사료로 보는 통일

남북기본합의서
2000~ 통일남북기본합의서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과 대북정책

북한의 연형묵 총리를 만나는 노태우 前대통령 [사진원본보기]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서는 평화가 필요

1980년대 후반 들어 2차 세계대전이후 세계를 양분했던 미소 냉전체제냉전체제1947년 미국의 대통령 고문이었던 버나드 바루크가 처음 사용한 용어로 미국과 소련, 그리고 그들의 동맹국들 사이에 전개된 제한적 대결상태를 의미한다. 냉전은 1947~8년 서유럽과 동유럽으로 나누어 형성되었고, 194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결성과 중국의 건국,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로 정점에 달했다. 그리고 1962년 쿠바에 소련의 미사일을 배치하려는 계획으로 전쟁직전까지의 위기를 겪기도 했다. 이후 미국과 소련은 대화를 통해 냉전시대를 관리했다. 세계적인 차원에서 냉전은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하여 1991년 소련의 해체와 사회주의국가들의 몰락으로 종말을 고했다.는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이런 정세에서 노태우 정부는 1988년 7ㆍ7 특별선언을 통해 북한을 대결과 적대의 대상이 아니라, 화해 협력을 바탕으로 공동번영을 추구하는 민족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식한다고 발표했다. 그해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렸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 서방국가들이 불참하고, 1984년 LA 올림픽 역시 공산국가들이 불참한 상황이기 때문에,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권과의 관계를 회복할 필요성이 있었다.
또한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1989년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을 북한에 제안했다. 자주, 평화, 민주의 원칙아래 민족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분단과 통일의 중간 과정으로 남북연합 단계를 설정했다. 1989년부터는 남북 경제교류가 시작되었으며, 1990년부터 총리를 대표로 하는 남북고위급 회담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1991년의 독일 통일, 한소 수교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남북한은 유엔에 동시가입하기도 했다. (1991.9)

전두환 정부의 '무산된 정상회담'

전두환 정부시기의 남북관계도 중요하다. 1984년 북한의 수해 물자지원을 전두환 정부가 받으면서, 1985년 이산가족 고향방문을 위한 적십자 회담이 열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한상일 안기부장 비서실장과 북측의 임춘길(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ㆍ최봉춘(조선노동당 비서국 과장)등의 비공개 접촉이 성사되었고, 이 접촉은 당시 안기부장 제2 특별보좌관이었던 박철언과 북측 UN대사였던 한시해의 이른바 '88라인'으로 지속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북한의 허담 당 비서가 1985년 9월 4일 서울을 방문하여 다음날인 9월 5일 전두환 대통령을 만났다. 허담은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 김일성의 친서를 전달했는데, 내용은 정상회담 추진에 관한 것이었다. 이미 남북 양측은 정상회담 개최에 원칙적인 합의를 했고, 밀사 접촉을 통해 정상회담에 들어갈 의제들을 협의하는 단계였다.
이어서 1985년 10월 16일 장세동, 박철언 등이 승용차 두 대에 타고 판문점을 거쳐 개성으로 넘어갔고, 개성역에서 특별 열차를 타고 평양을 향했다. 다음날 오전 장세동과 박철언은 김일성을 만났다. 장세동은 전두환의 친서를 전달했다.
당시 전두환 정부는 1986년 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정상회담을 서둘렀다. 그러나 1985년의 정상회담 추진은 그해 10월 부산 앞바다 청사포 간첩선 침투사건이 발생하면서 일시에 냉각되었다. 이후에도 정상회담을 위한 비밀접촉은 계속되었지만, 실제로 성사되지는 못했다.

1984년 남한의 수재민을 위해 북한이 보낸 쌀 [사진원본보기]

남북 관계의 장전, 남북기본합의서

상대의 실체를 인정한 남북기본합의서

남북기본합의서는 고위급 회담의 결실이다. 1991년 12월 서울에서 열린 5차 남북고위급 회담에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되었으며, 또한 북한과 함께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남북기본합의서는 1장 남북화해, 2장 남북불가침, 3장 남북교류ㆍ협력, 제4장 수정및 발표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본합의서 채택이후 남북한은 1장, 2장, 3장의 부속합의서를 채택하여, 분야별로 구체적인 협력 방안을 합의하였다.
남북기본합의서는 상대의 실체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합의서의 서명주체는 '대한민국 총리 정원식',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무원 총리 연형묵'으로 공식적인 국명을 사용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합의서에서 남북관계를 '통일을 향해 나아가는 잠정적 특수 관계'로 규정하고 회담에서는 서로를 '북측' '남측'이라 부르기로 합의했다.

→ 남북기본합의서 전문 참조

남북 교류협력의 시대가 열리다.

1988년 7∙7 선언을 통해 사회주의 국가에 문호를 개방하고, 남북 경제교류가 시작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1989년부터 주로 북한의 농수산물 등을 남쪽으로 갖고 오는 남북교역이 시작되었고, 이후 중소기업들이 북한에 투자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1992년 9월 17일 발효된 '남북교류협력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부속합의서'는 교류협력의 단기, 중기, 장기 과제를 망라하고 있다. 총20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경제교류 협력, 사회문화 교류협력, 인도적 문제로 구분되어 있다. 경제교류협력에서는 대금결제, 관세, 청산결제청산결제청산결제제도는 서로 무역을 하는 사이에 거래가 행해질 때마다 결제하지 않고, 양측이 지정은행에 설치된 청산계정에 수출과 수입을 적어놓았다가 일정 기간(6개월 혹은 1년)마다 대차잔액만을 결제하는 방식을 말한다. 청산결제제도는 1931년 스위스와 헝가리간의 무역에 처음으로 채택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주로 사회주의 국가간의 무역결제수단으로 통용되었다. 동독과 서독도 청산결제 제도인 스윙(Swing) 제도를 운영했다. 남북간은 1992년 9월의 <남북교류협력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부속합의서>에서 청산결제 방식에 합의하고, 2003년 8월 발효된 <4대 경제협력 합의서>에 따라 남측 수출입은행과 북측 조선무역은행을 청산결제은행으로 지정, 남북한 기업 교역을 청산거래방식으로 하기로 했다., 철도ㆍ도로 연결, 해로 및 항로의 개설, 우편과 전기통신, 국제적 협력 등 대부분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선을 넘어 길을 만든 민간 방북

1989년 문익환 김일성 주석과 통일방안을 논의하다.

1989년 3월 25일 문익환 목사는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해서 "나는 이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바랐던 윤동주의 마음, 모든 통일은 선이라고 외쳤던 장준하의 마음을 스스로의 마음으로 하면서 김일성 주석 동지를 만나고자 합니다."라고 말했다.
3월 27일 월요일, 문익환 목사는 김일성 주석의 공관으로 갔고, 거실에 들어서면서 두 팔을 벌려 김일성 주석과 세 번 포옹했다. 문익환 목사는 통일 논의를 정부가 독점하던 시절에, 김일성 주석과 통일방안을 논의했고, 남과 북에서 통일을 위한 장애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자고 말했다.
노태우 정부가 1988년 7∙7 선언을 발표하면서 남북 자유왕래를 선언했고, 정주영 회장의 북한 방문이 공표되던 시점이었다. 박철언을 비롯한 당국은 밀사의 이름으로 남북을 오가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러나 72살의 문익환은 방북사건으로 또 다시 구속되었다.

김일성 주석과 악수하는 문익환 목사 [사진원본보기]

1989년 임수경, 판문점으로 돌아오다.

임수경은 전대협 대표 자격으로 1989년 6월 30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임수경의 방북은 울림이 컸다. 통일운동사에 미친 영향은 말할 것도 없고, 북한 사회에 주는 충격도 적지 않았다. 한 해외동포 기자의 요청으로 부른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는 이후 남과 북이 만나는 장소에서 어김없이 불리는 노래가 되었다. 임수경이 입고 있던 청바지와 티셔츠도 북한 청소년 사이에 유행이 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임수경의 판문점 통과다. 그녀는 평양 도착성명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판문점을 통해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7월 27일 정전협정 기념일에 귀환하고자 하는 시도는 무산되었다. 유엔사는 한국정부의 동의가 없는 상황에서 판문점 통과를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 북측 역시 그런 상황에서 신변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면서 말렸다. 임수경이 판문점을 넘어 온 날은 8월 15일이다. 문규현 신부의 손을 잡고 금단의 선을 넘었다. 임수경 역시 밀입북 혐의로 귀한 이후 감옥으로 갔다.

군사분계선을 넘기 직전의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 [사진원본보기]

질문 남북기본합의서가 나오게 된 배경을 생각해 보자.
해답

우선적으로 노태우 정부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북방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 서구 국가들이 불참하고, 1984년 LA 올림픽에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불참한 상황에서,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권 국가들의 적극적 참여가 매우 중요했다. 올림픽 이전부터 사회주의권과의 관계개선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노태우 정부는 그 이후에도 북방정책을 지속했다. 당연히 사회주의권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는 남북관계를 발전시킬 필요가 있었다. 북한 역시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1991년 소연방이 해체되는 상황에서 남북대화를 거부하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남북고위급 회담이 시작되었고, 이 과정에서 남북관계의 포괄적 관계를 정리한 기본합의서가 채택될 수 있었다.



질문 남북관계의 역사에서 남북기본합의서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해답

남북기본합의서는 최초로 남과 북이 서로의 실체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한국전쟁 이후 남북한은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점을 강조해 왔다. 그런 점에서 화해, 협력, 공존을 약속한 기본합의서는 새로운 남북관계를 여는 장전의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기본합의서는 남북관계의 정치, 군사, 경제, 사회, 문화 등 포괄적 영역에서 매우 구체적인 합의를 이루어내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비록 합의사항을 곧바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남북한이 대화를 통해 중요현안에 대해 합의를 이룬 것은 장기적인 남북관계에서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