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친일파 명단공개를 요청하며 시위를 하고 있는 이북5도민회 중앙연합회원들
친일파는 대한제국 시절 한일병합에 적극 찬성하거나 매국조약 체결에 참여한 자와 일제강점기 일본의 식민정책에 적극 협력한 자들이다. 강제병합을 전후한 시기 이완용, 송병준 등 '을사오적', '경술국적'으로 지목된 한말 고위 관리들은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선 매국형 친일파라고 할 수 있다. 1910년 이후 일본은 원활한 식민통치를 위해 친일파들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경찰, 총독부 관료 등 식민통치에 협력하면서 같은 민족을 배반하는 무리들이 등장했다. 1931년 일본이 중국대륙침략을 본격화한 이후에는 장차 15년 간 조선인들을 강제동원하고 침략전쟁을 지지하는 데 앞장선 전쟁협력형 친일파들이 활약했다. 이들은 식민지 기간 동안 자신의 이익과 성공을 위해 어떤 범죄행위도 꺼리지 않는 기회주의적 인간형의 표본이다.
해방 후 친일파들을 처벌하자는 열기는 뜨거웠다. 그러나 남한에 주둔한 미군정미군정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삼팔선(힌반도 북위 38선) 이남 지역에 미군이 진주하여 9월 8일 부터 1948년 8월 15일 남한단독 정부가 수립되기까지 3년 동안 실시한 군사통치.은 치안유지가 가장 중요했고, 해방된 조선 사람들의 민족감정 같은 것은 고려하지 않았다. 맥아더맥아더미국의 군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맞이하여 1945년 8월 일본을 항복시키고 일본점령군 최고사령관이 됨. 6ㆍ25전쟁 때는 UN군 최고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지휘는 제1호 포고령포고령어떤 내용을 널리 알리는 법령이나 명령에서 '정부, 공공단체와 모든 공공사업기관에 종사하는 직원들에게 그대로 업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일제에 적극 협력했던 사람들이라면 미군정을 위해서도 충실히 일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경찰만 보더라도, 1946년 10월까지 임명된 서울시내 10개 경찰서장 중 9명이 일본경찰 출신이었고 나머지 1명도 군수 출신이었다. 이들은 독립운동가를 탄압하던 악질 고등경찰고등경찰[高等警察] 1911년 설치되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존속한 일종의 정치경찰. 일제강점기 사상·정치활동ㆍ언론ㆍ출판의 자유를 억제 감시하고 특히 독립운동가를 적발하고 민족정신을 말살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 이른바 사상범에 대하여 잔악한 고문으로 악명이 높았음이었지만 승진을 거듭해 한국 경찰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직위 | 1946년 총수 | 일본경찰출신 | 비율(%) |
---|---|---|---|
치안감 | 1 | 1 | 100 |
청 장 | 8 | 5 | 63 |
국 장 | 10 | 8 | 80 |
총 경 | 30 | 25 | 83 |
경 감 | 139 | 104 | 75 |
경 위 | 969 | 806 | 83 |
합 계 | 1,157 | 949 | 82 |
해방 직후 다른 정치가들이 친일파 청산을 우선 해결해야 할 과제로 꼽은 반면, 이승만은 정부수립 이후로 미루자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좌ㆍ우파를 가리지 않고 국내 정치세력이 모두 대표로 꼽을 만큼 유명했다. 그러나 그는 오랜 해외생활로 임시정부 대표 김구나 건국준비위원회건국준비위원회1885년 8·15광복 후 여운형(呂運亨)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최초의 건국준비단체. 설립목적은 민족의 총역량을 일원화하여 자주적으로 과도기의 국내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었음. 8월 18일 제1차 위원회를 개최하여 건국공작 5개 항을 제시하였고 9월 2일 강령을 발표.를 조직한 여운형, 조선공산당조선공산당1945년 9월 11일, 일제하에서 해산되었던 조선공산당이 재건된 것.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전 서울청년회계의 이영ㆍ정백ㆍ최익한 등 장안파 공산당과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경성콤그룹계의 재건파 공산당 양파의 통일된 형태였음. 주요 부서와 인물은 총비서 박헌영, 정치국 박헌영ㆍ김일성, 이무정 등이다. 재건된 조선공산당은 대중운동을 이끌어가는 한편,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여 통일전선운동을 주도했음. 그러나 미군정에 의해 탄압을 받고 불법화되었음. 1946년 11월 조선인민당ㆍ신민당과 함께 남조선노동당으로 통합.의 박헌영 등에 비해 국내 정치 기반이 약했다. 결국 이승만은 부족한 국내 기반을 메우기 위해 친일파와 손을 잡았다. 이승만은 '친일파 문제를 먼저 제기하는 것은 민심만 혼란하게 하는 것이고 정부를 수립한 후 조치하는 것이 순서'라며 일단 독립 정부 수립을 위해 무조건 뭉쳐야 한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친일파들이 다시 권력을 잡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첫 내각 관료들, 이중 친일경력자들이 있어서 국민들의 비판을 받았다.
새로운 국가를 세우기 전에 먼저 친일파들을 처벌하자는 여론은 신탁통치신탁통치국제연합 감독하에 시정국(施政國:신탁통치를 행하는 국가)이 일정지역(신탁통치지역)에 대하여 실시하는 특수통치제도. 논쟁 속에 묻혀버렸다. 1945년 말 열린 '모스크바 3상회의'모스크바 3상회의1945년 12월 소련 수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ㆍ영국ㆍ소련 3국의 외상회의(外相會議).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제반 문제 처리를 위한 목적으로 개최.를 둘러싸고 소련은 한반도 신탁관리를, 미국은 즉시독립을 주장했다는 잘못된 보도가 전해진 것이다. 조선공산당 등 좌익세력은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안이 사실상 남북통일 임시정부 수립안과 같았기 때문에 이를 지지했다. 그러자 우익세력들은 '신탁통치 주장하는 좌익'은 소련 사대주의 매국노로, '즉시 독립을 주장한 우익'은 애국민족세력으로 선전했다. 애국과 매국의 기준이 '친일을 했느냐'에서 '찬탁이냐 반탁이냐'로 바뀌었고, 친일파들은 적극적으로 반탁운동을 전개하면서 애국세력으로 둔갑했다.
해방 후 친일파 이종형이 발간한 대표적인 우익 언론지 <대동신문> 사설로 공산당이 민중의 인기를 얻으려고 자본가와 정적들을 민족반역자로 몰아 친일청산을 주장한다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우리민족의 거국적 염원은, 완전독립의 달성과 민주주의국가의 건설에 있음은 재론을 필요치 않는다. 우리는 이제 김구 주석을 맞이하여 세 번째요, 또 필연코 마지막인 전민족 통일에 의한 완전독립과 민주주의 건설의 기회에 당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 첫 번 기회는 소위 건준을 중심으로 조작한 인민공화국이다. (중략) 두 번째 기회로는 우리 이승만 박사의 환국과 독립촉성중앙협의회였다. 그러나 전민족이 그렇게 환호하고 맞이하며 지도자로 모신 이박사와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어찌하여 민중의 기대와는 달리 암초에 걸렸는가. 그것은 민족반역자처단에 대한 방법론 차이에 기인한 것이다. 즉 「민족반역과 친일파 잔존세력를 제외하는데 시간적 선후에 관한 문제」이니 공산당은 민족통일전선에서 우선 민족반역자와 친일분자를 제외한 후 통일하자는 것이오, 이박사와 각 정당은 먼저 통일하여 강토를 찾은 후에 이들을 처단하자는 데에 의견의 불일치를 가져온 것이다. (중략) 과거 일본제국주의의 주구였던 민족반역자를 미워하는 민중의 정의감을 현실적 토대로 민족반역자처단을 부르짖음으로써 자당(自黨)의 민중적 기반을 확대하고 일거에 미약한 이 땅의 자본가 지주계급을 거세하자는 데에 민족반역자선결론의 정치적 계급적 복선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정치, 경제의 혼란으로 파산상태에 민중은 과연 어느 편을 먼저 바라고 있는가! 민중은 언제나 예민한 정의감과 동시에 생활을 기저로 한 현실적 이해에 그 향배를 결정하는 것이다. 민중은 지금 과거의 살을 여위고 뼈를 깎이는 분장(憤臟)의 기억보다는 오늘의 배고픔과 추위에 서서 지금 먹을 빵을 달라고 외치고 있다. '하루바삐, 민족통일을 완성하여 나라를 찾고 편안히 살도록 해 주오'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제 김구주석은 세 번째의 기회를 가지시고, 아니 마지막 열쇠를 들고 계신 김구주석은 '민족반역자와 친일파는 먼저 제외하거나 나중에 처단하거나 역시 일반이 아닌가'하셨다. 그러나 공산당이 여전히 파괴를 돌보지 않는 전술론을 포기할 리 없는 이상, 민족반역자선결론은 여전히 민족통일선상에 가로놓여 있음을 우리는 확인하는 동시에 오로지 김구 주석의 탁월한 '결단'을 기대하는 바이다. 대동신문 (1945년 12월 1일자 1면) 설명 : 친일파 이종형이 발간한 대동신문은 해방 직후에 이미 정치적 견해 차이를 강조하여 민족 내부의 갈등과 불안을 크게 과장하면서 '친일파 청산'이 오히려 민족의 분열과 자주적인 독립국가 수립을 방해하는 듯이 보도했다.
한반도를 분할점령 한 미군정이 친일파들을 행정자문과 관료로 다시 채용했기 때문에 인적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방 후 가장 인기가 많았던 정치가 이승만은 부족한 국내 정치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친일경력자들과 손을 잡았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사항을 둘러싸고 정치세력이 좌우로 나뉘자 친일파들은 즉시 독립과 신탁통치 반대를 주장한 자신들이 애국자라고 선전했다.
친일파 청산은 새로운 국가 수립에 먼저 해결해야할 과제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