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마산의 유신반대운동
유신체제유신체제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여 헌정을 중단시킨 후 유신헌법을 공표하고 이를 10월 유신이라 하였다. 유신체제란 유신헌법을 골자로 짜여진 공개적 독재체제를 뜻한다. 유신(維新)이란 개혁을 의미하는 한자말이다. 는 박정희 대통령의 절대권력 아래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꽁꽁 얼어붙었던 겨울공화국이었다. 유신체제의 결정판은 긴급조치 제9호였다. 긴급조치 제9호는 유신헌법을 반대하거나 개정을 청원만 해도 처벌하고 그런 행위를 방송하거나 보도해도 처벌하도록 했다. 따라서 언론은 긴급조치 위반 사건을 알릴 수 없었고 국민들은 민주화운동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국민의 눈과 귀를 막은 유신독재 아래서 부산과 마산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살펴보자.
1976년 2월 10일 경찰은 부산 중부교회 대학생부의 회지인 '책방골목'을 문제 삼아 학생 3명을 구속하였다. 이 회지에 인사말로 쓴 글과 함께 게재된 양성우, 정희성의 시 등을 문제 삼았고 구속자는 당시 중부교회 대학생부 조태원, 김영일, 이태성 등이었다. 이 사건은 긴급조치 9호 때문에 신문에 보도조차 되지 않았다.
(전략) … 동월 14. 12:30경 같은 장소에서 회지 창간호 "인사의 말"을 피고인 조태원이 작성하여 같은 달 25. 16:00경 같은 구 대청동 소재 시청각 교육국 부산지부 사무실에서 등사판을 빌려 모두 12장으로 된 회지 76부를 만들어 그 회지 첫장 "인사의 말"에 “아프다. 아파도 왜 때리느냐고 반항하지도 못한다, 불쌍한 사람들, 나와 너 똑같이 힘없는 사람들, 우리 약한 힘을 모아 아프다고 고함이라도 질러보자, 왜 때리느냐고 반항해 보자, 달려들어 같이 치고 받고 육탄전이라도 해보자, … 운운, 이 땅을 사랑하고 이 백성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우리 올바른 삶을 위하여 아니 떳떳한 죽음을 위하여 힘써 이 땅의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실현시키자, 한국적이니 유신이니 따위는 말고 좀 더 거시적인 안목으로 … 운운의 내용을 실어 동 내용이 대한민국의 유신헌법을 부정, 반대, 비방하는 표현물(문서)임을 잘 알면서 이를 신도들에게 배포할 것을 공모하고 김영일은 같은 해 1. 28. 17:00경 위 늘봄주점에서 교인 박상도에게 회지 1부, 동년 2. 8. 12:30경 부산 중부교회에서 교인 차선각 외 4명에게 회지 6부, 같은 김영일, 같은 조태원은 같은 달 1. 12:00경 부산진교회 청년회 사무실에서 회원 김재천 외 1명에게 회지 15부, 같은 조태원은 같은 날 12:00경 부산 중부교회 교육관에서 회원 장환기에게 회지 1부, 같은 이태성은 같은 달 1. 12:30경 위 같은 장소에서 목사 심응섭 외 교인들에게 회지 21부, 14:00경 같은 장소에서 회원 최영이에게 회지 1부 합계 27명에게 회지 45부를 배포한 것이다. … (하략)
유신체제 아래서 노동자들의 삶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하루 12시간이 넘는 살인적인 노동시간, 쥐꼬리만한 월급, 거기에 기업주와 관리자의 비인간적인 대우와 폭력 속에 인간다운 삶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특히 부산과 마산은 1960년대부터 수출 위주의 경공업경공업제조공업을 제조되는 생산물의 중량에 따라 2가지로 나눌 경우, 주로 섬유 ·잡화(雜貨) ·식품 공업 등 생산물의 중량이 가벼운 산업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 발달했으나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중화학공업화중화학공업','중공업에 화학공업을 곁들인 것의 총칭. 공업화는 섬유공업 또는 잡화공업 등 경공업에서부터 점차적으로 철강업과 같은 중공업으로 발전한다. 한국의 중화학공업은 1960년대에 철강업을 위시하여 석유화학 ·전자공업 ·조선 ·자동차 ·전력 등의 본격적인 발전이 통합적으로 진행되었다.에서는 제외되었다. 그러나, 세계경제의 불경기와 무리한 중화학공업화의 부작용으로 1978년 말부터 경제위기가 닥쳐오자 부산과 마산의 경공업 수출산업은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인천 동일방직에서 노동조합노동조합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자주적으로 단결하여 근로조건의 유지, 개선 기타 노동자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조직하는 단체 또는 그 연합단체.활동을 하다 해고되어 부산 삼화고무 공장에 취직한 추송례의 일기를 통해 당시 부산지역 노동자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살펴보자.
1979년 4월 9일 새마을 가창 시간이라고 해서 30분 이상 포화부 전원이 모여서 노래 불러야 한다. "새벽종이 울렸네 ∼∼" 모두들 짜증스러운 얼굴로 기계적으로 손뼉을 치고 입을 들썩거리는데 … 그런 우리 모습이 보기에 그랬는지 지도원(반장)과 과장이 고래 고래 고함을 치면서 화를 냈다. "즐거웁게, 신나게, 좀 부를 수 없냐?"고 야단을 쳐댔다. 무서운 명령에 떨면서 배에 힘을 넣어가면서 억지로 큰 소리로 목청을 높였더니 목이 아프고 골치까지 아펐다. 억지춘향으로 울며겨자 먹기로 노래 부르는 우리들이야 신이 날 턱이 없지만 소리가 높아지고 손뼉소리가 커지니 과장이란 놈은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이 얼마나 신나고 재미있는 시간입니까? 내일부터는 좀 더 일찍 출근을 해서 노래합시다." 그 때 가운데에서 누군가 쓰러졌는데 웅성 웅성 소란했다. 나는 마음 속으로 매우 놀랐고 그러면서도 이젠 마치겠구나 하는 기대로 기뻐했건만 과장은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조용하라고 소리치면서 계속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사람이 쓰러졌는데 살펴보지도 않고서 … 지겨워. 이 더럽은(*더러운) 세상을 살아야 하나.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 한가지다. 얼마나 충격을 받었는지 앞으로 살아날 일들이 무서워 비틀거렸다. 아무렇지도 않게 답답하게 서 있는 동료들로 인해 현장 공포증이 걸려 버렸다. 이런 일이 나의 공장 동료들에게 (매일 반복) 아무 반응이 없다. 표정도 없다. 무신경. 무표정 = 무반응. 공장 동료들의 이런 모습이 나를 현장에 대해 떨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오늘도 하루 종일 한사람 말해보지 못한 채 불안에 떨다가 12시간 근무를 마쳤다. … (하략)
이 무렵 공장의 분위기는 군대의 병사처럼 노동자들도 관리자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도록 강요하였다. 많은 노동자들은 이러한 군대식 작업장 문화에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에 동료를 걱정하기 이전에 관리자의 명령을 더 두려워했다.
1970년 1월 1일 마산수출자유지역은 수출진흥, 고용증대, 기술향상, 지역개발 등의 목적으로 개설되었다. 1977년 말 현재 입주 기업 약 100개사 가운데 91개사가 일본기업이며 이 회사들은 노동집약적 가공공장으로 대부분 공해업종이었다. 여기서 노동자들은 저임금, 산업재해, 직업병에 시달렸고, 여성들은 일본인들의 성추행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최순임이라는 여성 노동자가 소설 형식을 빌어 쓴 "수출자유지역의 하루"라는 글을 통해 당시 노동자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전략) … 노사위원은 근로자측 여섯명, 사용자측 여섯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언젠가 오후 휴식시간을 이용해 고향에 같이 있는 언니 부서를 찾아 가다가 삼층 회의실 앞을 통과하게 되었는데 마침 노사협의회가 개최되는 시간이었다. … 그런데 그 이튿날 아침 조회석상에서 노사위원 근로자측 대표 한 사람이 현재 회사 사정이 많이 어렵다며 다음과 같이 통고했다. 일본에서 주문이 20% 떨어졌으니 모든 구매지출에 있어서도 지난달 보다 20% 절약을 해야 한다. 잔업수당도 지급할 처지가 못되므로 각 벨트 별로 정상 근무 시간 내에 목표 달성이 되도록 하고 그 때까지 수량이 미달되었을 시는 새마을 잔업으로 보충하겠다. 이렇게 되자 야간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퇴근시간까지 목표 달성을 못한 날은 학교에도 못가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작업을 해야만 했다. 그 이후 영순이는 노사협의회란 단어는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 도외시해 왔다. … 정말인지 몰라도 지난 해 연초 승급 때는 노동청의 어느 근로감독관이 노사협의회 장소에 나타나서 근로자 대표에게 정부에서 급료 인상은 연 10% 미만으로 묶어 물가를 안정시킬 방침이므로 사용자에게 무리한 강요를 하는 것은 정부시책에 어긋난다며 전·후반기 각각 5%선을 가지고 논하라는 말을 남기고 갔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노사위원들은 그 근로감독관의 말을 어김없이 실행했다. 영순이는 지난 해까지 자취할 때의 생활을 생각해 본다. 급료의 절반이 방세로 지출되다 보니 저축은 생각지도 못했고, 절약하기 위해 친구와 같이 생활해도 연탄값, 쌀값을 제하고 나면 부식비가 적어 김치 하나만 담궈 놓고 먹는 게 고작이었다. 그나마 아침을 굶을 때가 많았으니까 … (하략)
1977년 말, 대통령 박정희는 목표보다 일찍 100억불 수출을 달성했다고 자랑하였다.
그러나, 경제성장의 성과는 불공정하게 분배되었고 정치적 억압은 더욱 심해졌다. 그 결과 1978년 12월 12일에 실시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들은 집권당인 민주공화당보다 야당인 신민당에게 더 많은 표를 던졌다. 이러한 국민의 선택은 야당에 자신감을 주어 다음해인 1979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유신체제와 타협했던 이철승 대신 유신헌법의 개정과 민주화를 요구한 김영삼이 총재로 선출되어 유신 반대 열기가 한층 높아졌다. 그러자 유신정권은 김영삼 체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정치공작에 몰두하여 8월에 YH여공들의 신민당사 농성을 강제진압하고 9월에는 신민당 총재 등에 대한 직무집행가처분직무집행가처분가처분 신청을 인정하여 법원이 행하는 명령. 1979년 8월 신민당의 일부 대의원들이 절차상의 이유를 들어 그 해 5월의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김영삼 총재와 간부들의 직무집행을 중지해 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했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정치탄압 논란을 일으켰다. 을 통해 정당의 기능을 마비시켰고 마침내 10월에 김영삼 총재를 국회에서 제명하기에 이르렀다.
김영삼 총재는 1979년 9월 15일 미국의 뉴욕 타임즈 지와 기자회견을 하면서 유신헌법과 미국의 한국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문제의 뉴욕 타임즈 기사는 다음과 같다.
(전략) … 김총재는 이번 주 그의 자택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미국은 날이 갈수록 국민들로부터 유리돼 가고 있는 정부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다수 간에 어느 편을 택할 것인가를 분명히 해야 할 때가 왔다”고 말했다. … "우리는 카터 대통령이 한국에 오지 말라고 요구했다. 이유는 그의 방한이 박대통령의 억압정책을 강화시켜 주리라는 점 때문이었다. 이 모든 우려는 이제 현실로 나타났다. 나는 그의 방한을 생각하면 분노를 누를 길이 없다" … "내가 미국관리들에게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압력에 의해서만 미국이 박대통령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 그들은 언제나 한국의 국내정치에 간여할 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이것은 속임수의 논리이다. 미국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한국에 3만 지상군을 주둔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국내문제 간여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 "나는 아직도 북한과 싸워나가는 데 있어 최선의 그리고 유일한 방법이 언론, 집회의 자유와 자유선거를 통해 우리의 정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라고 확신하고 있다"고 김총재는 말했다. … (하략) 자료제공 : 한국일보 1979년 9월 20일
김영삼 총재의 발언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생각해 보자.
국회는 4일 하오 본회의에서 신민당 김영삼 의원에 대한 징계동의안을 법사위가 제명키로 결의한 대로 가결 통과시켰다. 백두진 국회의장은 이날 상오 10시 본회의에서 김의원 징계동의안을 보고, 발의시키려 했으나 신민당 의원들의 단상 점거 등 적극 저지에 부딪쳐 하오로 회의를 미루면서 발의를 시도한 끝에 하오 1시 16분께 본회의장 국무위원석 뒷자리에 서서 『성원이 됐으므로 개회를 선포한다』고 선언한 다음『김영삼 의원 징계동의안을 법사위에 회부코자 하는데 이의가 없는가』고 묻고 여당 석에서 『이의가 없다』고 하자 단상을 점거한 야당 의원들이 알아차리기도 전인 14초 만에 『법사위에 회부됐음을 선포합니다』고 말했다. 백의장은『본회의 정회를 선포한다』고 말한 뒤 서편 문으로 퇴장했다. 이에 따라 법사위는 이날 하오 1시 21분께 공화·유정 소속 12명 위원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징계 제안 설명을 유인물로 대체하고 김영삼 의원을 헌법 98조 2항에 의거, 단 1분 만에 제명키로 결의, 본회의에 넘겼다.… 여당권은 신민당 의원들이 계속 본회의장에서 농성하고 있는 한 본회의 재개가 불가능하다고 보고 이날 하오 제3의 장소로 회의장을 옮겨 여당의원만으로 법사위 결정대로 김의원 제명에 따른 모든 법적 절차를 밟았다. … (하략) 자료제공 : 경향신문 1979년 10월 4일
11979년 10월 4일 오후 4시 5분, 국회는 국회의장 백두진의 경호권경호권국회의장이 회기 중에 의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행사할 수 있도록 국회법에 규정된 권한으로서 의원과 방청인 그리고 그밖에 원내에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명령하고 물리적으로 강제할 수 있다. 발동에 따라 본회의장 출입구와 복도를 300여명의 사복경찰과 50여명의 국회 경위들이 차단, 야당의원들의 접근을 막은 가운데 여당의원 총회실에서 본 회의를 18분 동안 열어 김영삼의 제명결의안을 기습적으로 통과시켰다. 공화·유정회 의원 159명 전원이 투표에 참석, 전원이 찬성 투표를 했다. 의정사상 제명 1호를 기록하는 오욕의 순간이었다. 이어 여당 의원들만으로 법사위원회법사위원회법사위원회','법제사법위원회의 준말. 국회에서 법률과 사법에 관한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만든 상임위원회의 하나임.를 열어 40초 만에 제명을 결의함으로써 뉴욕 타임즈와의 기자회견을 문제 삼아 야당 총재의 국회의원직을 박탈했다.
김영삼 총재의 발언이 사대주의사대주의주체성 없이 세력이 큰 나라나 세력권에 붙어 그 존립을 유지하려는 주의로서 국위를 손상하고 한-미동맹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주며 "미군 주둔이 내정간섭내정간섭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국내 정치에 개입하여 간섭하는 일"이라는 말은 북한의 주장과 같다는 등의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