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보는 5∙18민주화운동

유신체제의 종말과 서울의 봄
1980 5∙18민주화운동유신체제의 종말과 서울의 봄

부마민주항쟁과 신군부의 등장

부마민주항쟁

부산 시내로 진출하는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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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체제의 막바지,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 수준은 한계점을 이미 넘어 그 싹을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극단적인 유신체제의 폭압 속에서도 저항의 불길이 타올랐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에서 발발하여 마산, 창원에서 전개되었던 부마항쟁이다.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촉발시킨 부마항쟁은 시민이 주체가 된 대규모 항쟁으로 신속하게 확산되었다. 약 4일 동안의 부마항쟁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외친 구호는 "유신철폐! 독재타도!"였다. 박정희 정권은 18일 밤 0시를 기해 부산에 비상계엄령, 마산 등에 위수령위수령1970년 대통령령 제4949호로 제정된 법률. 육군의 부대가 특정한 지역에 계속 주둔하면서 경비, 군대의 질서 및 군기 감시와 시설물을 보호하도록 함. 박정희 정권은 위수령을 발동하여 대학에 무장군인을 진주시키고, 휴업령을 내렸음을 선포하고 탱크로 무장한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25분경 박정희 대통령은 궁정동의 밀실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사망하였다. 이 사건으로 19년 동안 계속된 박정희 정권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지만 10ㆍ26사건은 권력의 공백을 가져왔다.

신군부의 등장

보안사에 모여 기념 촬영을 한 12∙12사건의 주역들 [사진원본보기] 자료제공 : 경향신문

이 기회를 틈타 전두환, 노태우 등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들이 군부쿠데타 이른바 '12ㆍ12사건'을 일으켰다.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과는 다르게 군부내 권력투쟁이 전개되었다. 12ㆍ12사건을 일으킨 전두환 등의 신군부는 최규하 대통령에게 계엄사령관이면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의 체포 동의서에 서명할 것을 수차례 요구해 목적을 달성함으로써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1980년 서울의 봄

시국성토를 위해 서울역으로 향하는 학생들과 남대문에서 대치한 무장 경찰들 [사진원본보기]
자료제공 : 경향신문

1980년 봄이 되면서 대학가를 중심으로 새로운 바람이 일었다. 유신체제에 항거하다 해직되었거나 제적되었던 교수와 학생들이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학원의 자유화를 주장하는 흐 름이 형성되었고, 학생 자치기구들이 부활했다. 특히 4월부터 '학원민주화운동'이 전국의 대학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5월이 되자, 대학생들은 신 군부의 정치 개입이 한국의 민주화에 가장 큰 걸림돌임을 확신하고, 정치 민주화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재야세력과 야당에서도 '민주화촉진국민선언문'을 발표하는 등 정치민주화를 요구하는 주장들이 폭발했다.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운동이 더욱 활성화되자, 정부는 전국 대학 총학장들에게 공문을 보내 학생 집회 및 시위에 대처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대학 총학장들은 집회와 시위가 계속되면, 휴업 및 휴교 조치를 할 것을 결의한다. 중앙정보부중앙정보부1961년 6월 10일 제정된 <중앙정보부법(법률 제619호)>에 의거 김종필이 주도해 발족한 정보ㆍ수사기관가 북한의 남침설을 흘리면서 위기 국면을 조성하고, 이에 따라 5월 12일 임시국무회의가 긴급 소집되어 비상경계체제 돌입 명령이 시달되는 등 정세가 급박하게 전개되었다.

전국 23개 대학이 참여한 총학생회장단은 5월 10일 고려대에서 회의를 갖고,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 전두환ㆍ신현확 등 유신잔당의 퇴진" 등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한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간헐적으로 전개되었던 집회와 시위는 5월 13일 연합 시위로 바뀌었고, 5월 14일에는 서울지역 27개 대학 약 7만 명이 참여하는 가두시위가 있었다. 그리고 5월 15일 서울역 앞 광장과 도로에서의 시위에는 약 10만 명이 참여했다. 학생들은 당일 밤 7시 50분에 발표된 신현확 국무총리의 특별담화특별담화특별한 시기 또는 주제에 대해 한 단체 또는 공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이 견해나 태도를 밝히는 말를 믿고 학교로 돌아가는 '서울역 회군'을 했다. 그리하여 5월 16일부터는 광주지역 대학들을 제외한 전국의 대학에서 정상 수업이 이루어졌다.

5월 16일 김영삼 신민당신민당제6대 대통령선거와 제7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1967년 2월 7일에 야당계열인 민중당과 신한당이 결합해 창당한 당으로, 김영삼은 1974년 8월과 1979년 5월에 총재로 선출되었음 총재와 김대중 국민연합국민연합1979년 3월 1일 반유신투쟁과 민주화운동의 구심체 조직으로 재야가 결성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공동의장이 '비상계엄 즉시 해제, 정부 주도 개헌작업 포기, 정치일정 연내 완결 확정 발표' 등 6개항의 시국수습대책을 공동으로 발표했다. 국민연합은 앞서 발표한 시국선언문에 대한 답변을 5월 19일까지 요구했으며, 전국 대학 총학생회장단 역시 5월 19일까지 '전두환ㆍ신현확 퇴진, 비상계엄 해제 및 연내 정권 이양'을 약속해 줄 것을 요구했다.

질문 매우 어렵게 형성되었던 한국의 민주화 기회를 무산시킨 '12∙12사건'의 주축은 누구였는가?
해답

전두환과 노태우 등이 주축이 된 '하나회'라는 모임의 군인들



질문 1980년 3월에서 5월 사이에 전국에서 민주화를 외쳤던 시기를 '서울의 봄'이라고 한다. 이때 요구되었던 주요 내용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해답

학원민주화, 비상계엄해제, 유신잔당 퇴진, 정치일정 확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