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이후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6∙25전쟁 이후에는 미국으로부터 공짜로 경제적인 원조를 받았으나 그마저도 1950년대 후반에는 갚아야 할 차관으로 바뀌게 되었다.
4∙19 혁명으로 집권한 민주당정부는 잘못된 정치운영과 경제정책의 실패에 따라 국민들의 비판을 받고 있었다. 이런 비판 속에서 민주당정부는 경제개발을 계획성 있게 추진하기 위해 1961년 4월말에 경제개발5개년계획안을 완성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달인 5월 16일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빼앗은 군사정권은 이 경제개발5개년계획안을 베껴 7월 3일 5개년종합경제재건계획안을 발표하였다. 5∙16 군사정변의 주동세력은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200여 명의 장교와 그들의 지휘아래 있었던 3000여 명 정도의 군인에 불과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정변이 성공한 것은 그들이 내건 반공, 친미, 경제재건이 군부의 뜻을 잘 반영하였기 때문이었다.
사회 안정과 경제개발을 앞세운 군사정권은 무엇보다 경제개발을 위한 자본이 필요하였다. 박정희정권은 미국의 지지와 경제 원조를 보장받기 위해 베트남 파병베트남 파병베트남에 1965년부터 1973년까지 10여년 동안 5만 여명의 한국군이 파견되었다. 베트남 파병으로 경제적 이익을 얻었으나 5,000여 명의 한국 젊은이가 목숨을 잃었고, 한국군이 저지른 베트남 양민학살문제로 국제적∙사회적 비난을 받고 있기도 한다. 을 추진하였다. 베트남 파병의 비용은 미국이 부담했는데, 한국기업은 베트남 건설 사업과 수출에 참여하여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 서독과는 차관을 받는 조건으로 광부와 간호사의 파견을 추진하였다. 1963년부터 70년대 후반까지 간호사 1만 30명, 광부 7,800여 명이 서독에 파견되었는데, 이들의 송금액은 연간 5,000만 달러로 한때 GNP의 2%에 달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이 자본을 마련하기 위해 가장 먼저 눈을 돌린 곳은 일본이었다.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은 1952년부터 1961년 5월 15일까지 5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러나 양측의 입장 차이가 너무 커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