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제사회는 동서 긴장완화(데탕트)를 추구한다. 1970년 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닉슨 독트린닉슨 독트린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 혹은 괌 독트린(Guam Doctrine)은 1969년 7월 25일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밝힌 외교정책이다. 앞으로 미국은 베트남 전쟁과 같은 군사적 개입을 피할 것이며, 아시아 각국이 분쟁을 스스로 해결해 나갈 것을 촉구했으며, 아시아에서 미국의 재정적 부담을 줄여 나가겠다는 구상이다. 베트남 전쟁 때문에 생긴 막대한 재정적자를 줄여나가기 위한 외교구상으로 한반도에서는 주한미군의 감축으로 이어졌다.(1969년) 발표에 따른 긴장완화와 평화공존의 분위기로 조성된 국제정세 속에서 한반도 평화정착, 남북교류협력, 총선거 등을 내용으로 하는 8ㆍ15 평화통일 구상을 발표하였다.(1970년) 1971년 대한적십자사는 1천만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북한에 제의하여 남북적십자 회담이 시작되었다. 1971년 8월 20일 12시 남과 북의 적십자 대표들이 분단이후 처음으로 판문점에서 만나 신임장을 교환했고, 8월 22일에는 분단이후 처음으로 직통전화를 개통했다. 남측 '자유의 집'과 북측 '판문각'사이 70m 사이를 두고 18분간의 통화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남북 적십자 회담을 위한 1차 예비회담이 1971년 9월 20일 열렸다. 본격적인 회담이 시작된 것이다. 이후 25차례의 예비회담과 실무회의를 거쳐 1972년 8월 29일 1차 적십자 본 회담이 평양에서 열리게 된다. 그날 오전 10시 31분 7초에 이범석 수석대표를 비롯한 적십자 대표들이 판문점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 전쟁이후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남북적십자 회담이 진행되면서, 남과 북은 비밀협상을 시작했다.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을 시작한지 두 달 만인 1971년 11월 19일 9차 예비회담 때였다. 당시 남측 대표 중 한명이었던 정홍진은 북측의 김덕현에게 쪽지를 슬쩍 던졌다. 회의 끝나고 따로 보자는 내용이었다. 정홍진은 중앙정보부중앙정보부1961년 만들어진 정보 수집 및 대공 수사 기관이다. 이후 1980년 12월 중앙정보부는 국가안전기획부로 확대 개편되었으며, 1999년 1월 다시 국가정보원으로 명칭이 변화되었다. 국장대리로 재직하다 적십자로 전직한 상태였고, 김덕현은 노동당 조직부 소속이었다.
1972년 3월 28일부터 정홍진이 최초의 비밀 방북을 했고, 1972년 4월 19일 김덕현이 비밀리에 서울을 방문했다. 이들의 실무적인 접촉을 거쳐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1972년 5월 2일 평양을 방문하고 5월 29일에는 북한의 박성철이 마찬가지로 비밀리에 서울을 방문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7∙4 남북공동성명이 채택될 수 있었다.
북한의 적십자 대표단이 처음으로 서울을 방문한 것은 1972년 9월 12일 2차 예비회담이었다. 이날, 판문점을 지나, 문산, 박석고개, 홍은동, 무악재, 사직터널을 거쳐 중앙청, 시청 앞에 이르는 연도에는 많은 시민들이 나와 구경했다.
연도에 서서 구경을 하는 시민들의 표정은 착잡했다. 그중에는 이산가족들이 많았다. 38선이 가로막혀 부모 형제와 헤어져 산지 어언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진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북쪽 대표들이 지나가는 길을 따라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기대'는 얼마가지 않았다. 9월 13일 열린 회담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었다. 온 국민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분단이후 처음으로 접하는 북쪽 대표의 발언에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나 북쪽의 연설은 이산가족 만남의 기대로 접어두었던 '마음속의 38선'을 불러 왔다. 북측의 자문 위원이었던 윤기복이 '우리 민족의 경애하는 김일성 수령' '영광스러운 민족의 수도 평양'이라는 표현의 정치연설을 시작 하자 난리가 났다. 9월 13일 하루 동안 서울시경 112와 113 범죄 신고대에 접수된 169건의 전화 중 북한의 '정치 선전을 규탄하는 시민들의 항의전화'가 60건이나 되었다.
7∙4 공동성명은 닉슨행정부의 중국과의 화해와 주한미군 감축, 그리고 박정희 정권의 국내정치적 필요가 결합되면서 추진되었다. 7∙4 공동성명에서 남북은 우선적으로 3대 통일원칙을 합의했다. 그것이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다.
또한 2항에서 남북 사이의 긴장을 완화하고 신뢰를 조성하기 위해 서로 상대를 중상 비방하지 않으며, 무장도발을 하지 않고, 군사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했다.
3항에서는 끊어졌던 민족적 연계를 회복하기로 했으며, 남북 사이의 다방면적인 제반교류를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4항에서는 남북적십자 회담의 성사를 위해 노력하기로 했으며, 5항에서는 돌발적인 군사사고를 방지하고, 남북 현안을 처리하기 위해 상설 직통전화를 놓기로 합의했다.
7∙4 남북공동성명이후 남북한은 통일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공식 대화기구인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하여 남북대화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남북대화는 오래 지속하지 못했다. 또한 남북한은 이 국면을 국내정치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남한에서 유신체제유신체제193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선언 발표와 계엄령 선포로 3공화국이 중단되고 그해 12월 27일 유신헌법이 발표되었다. 대통령 선거가 직접선거에서 간접선거로 바뀌었고, 대통령의 권한이 강화되었고, 사회운동과 노동운동을 억압하는 각종 법률과 제도가 만들어졌다.가 출범했고, 북한은 주석제주석제북한은 1972년 12월 27일 사회주의 헌법을 새로 만들어, 국가의 최고지도자를 지칭하는 직위로 주석을 신설했다. 주석제의 신설은 최고지도자의 기능과 역할, 권위를 강화하는 계기로 작용했다.를 채택했다.
1973년 박정희 정부는 평화 통일 외교 정책선언(6ㆍ23 평화통일선언)을 발표하여 북한에게 남북한의 유엔동시가입과 호혜 평등의 원칙아래 모든 국가에 문호를 개방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북한은 이 선언이 7∙4 공동성명에서 합의한 통일 원칙에 위배된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남북대화를 중단했다.
7∙4 공동성명은 실질적으로 남북관계 개선에 도움을 주지는 못했지만, 남북한의 최초의 합의문서이고, 동시에 1985년 남북경제회담,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의 주요한 근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합의로 평가할 수 있다.
최근 평양과 서울에서 남북관계를 개선하며 갈라진 조국을 통일하는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회담이 있었다. 서울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1972년 5월 2일부터 5월 5일까지 평양을 방문하여 평양의 김영주 조직지도부장과 회담을 진행하였으며, 김영주 부장을 대신한 박성철 제2부수상이 1972년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서울을 방문하여 이후락 부장과 회담을 진행하였다. 이 회담들에서 쌍방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하루빨리 가져와야 한다는 공통된 염원을 안고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교환하였으며 서로의 이해를 증진시키는데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쌍방은 오랫동안 서로 만나보지 못한 결과로 생긴 남북사이의 오해와 불신을 풀고 긴장의 고조를 완화시키며 나아가서 조국통일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 완전한 견해의 일치를 보았다. 1.쌍방은 다음과 같은 조국통일원칙들에 합의를 보았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ㆍ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2.쌍방은 남북사이의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신뢰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서로 상대방을 중상 비방하지 않으며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무장도발을 하지 않으며 불의의 군사적 충돌사건을 방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하였다. 3.쌍방은 끊어졌던 민족적 연계를 회복하며 서로의 이해를 증진시키고 자주적 평화통일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남북 사이에 다방면적인 제반교류를 실시하기로 합의하였다. 4.쌍방은 지금 온 민족의 거대한 기대속에 진행되고 있는 남북적십자회담이 하루빨리 성사되도록 적극 협조하는데 합의하였다. 5.쌍방은 돌발적 군사사고를 방지하고 남북 사이에 제기되는 문제들을 직접, 신속 정확히 처리하기 위하여 서울과 평양 사이에 상설 직통전화를 놓기로 합의하였다. 6.쌍방은 이러한 합의사항을 추진시킴과 함께 남북 사이의 제반문제를 개선 해결하며 또 합의된 조국통일원칙에 기초하여 나라의 통일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이후락 부장과 김영주 부장을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ㆍ운영하기로 합의하였다. 7.쌍방은 이상의 합의사항이 조국통일을 일일천추로 갈망하는 온 겨레의 한결같은 염원에 부합된다고 확신하면서 이 합의사항을 성실히 이행할 것을 온 민족 앞에 엄숙히 약속한다. 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 이 후 락 김 영 주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던 1972년 7월 4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기자회견에서, 기자는 "공동성명에서 남북 쌍방은 상호 중상 비방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앞으로 북괴라는 용어 및 호칭, 김일성이라는 호칭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나?"고 질문했다. 이 부장은 대답했다. "우리가 북한 괴뢰니 하고, 북한에서는 남조선 괴뢰니 하는 용어는 다른 좋은 표현으로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7월 5일 각 부처와 지방자치단체 공보관회의에서 문공부는 "종래 북괴로 부르던 것을 북한으로 호칭하고, 김일성에 대한 중상 비방을 삼갈 것"을 지시했다. 이후 모든 언론과 정부의 공식 홍보물에서 '북괴'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북한'이 차지했다. 그러나 7∙4 남북공동성명으로 화해가 이루어진 남북관계가 다시 대결국면으로 전환했을 때, 사라졌던 '북괴'라는 호칭은 다시 살아났다. 1974년 6월 문교부는 '교육지도'에서 지리적 개념으로는 '북한', 정치적 비인도적 개념으로는 '북괴'로 표현토록 하는 지침을 내렸다. 모든 언론은 이미 1974년 초부터 다시 '북괴'라고 쓰기 시작했다.
7∙4 남북공동성명 국면이 성과 없이 끝나면서, 남북한은 다시 긴장 상황을 맞게 되었다. 1976년 8월 18일 한국전쟁이후 가장 전쟁에 근접했던 아찔한 충돌이 판문점에서 발생했다. 사건의 발단은 판문점 회의장 서쪽 유엔군 관측소 사이에 서 있던 미루나무 한 그루였다. 유엔사 소속의 미군 장교 2명이 관측소의 시야를 가릴 만큼 훌쩍 자라난 나무를 자르러 갔다가 북한 경비병들에 의해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 이후인 8월 21일 경비병 1개 소대가 앞서고 64명의 한국 특전사 대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16명의 미군 전투 공병단원들이 미루나무로 향했다. 사건직후 발령되었던 '데프콘 3(Defense Readiness Condition 3 : 예비경계태세)'는 데프콘 2(공격준비태세)까지 올라갔다. '데프콘 3' 조차 한국전쟁 이후 이때가 처음이었다.
항공모함 미드웨이가 75대의 전폭기를 적재하고 일본에서 한국의 동해로 들어 왔고, 오키나와 미군기지에서 전투기 40대로 구성된 2개 전투단이 한국공군기지로 이동했으며, F-111 20대와 B-52 폭격기들도 미국 본토에서, 괌 공군기지에서 한국으로 향했다. 전쟁 일보직전의 아찔한 순간이었다. 다행스럽게 충돌 없이 작전은 성공했다. 미루나무를 잘라버린 것이다.
첫째, 자주다. 통일을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정신이다.
둘째, 평화다. 통일을 무력이나 군사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셋째, 민족대단결이다. 사상과 이념·제도의 차이를 넘어서서 하나의 민족으로 단결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7∙4 공동성명은 분단 이후 남북한이 처음으로 만나서 합의한 문서이다.
통일의 원칙을 밝혔고, 비방중상을 그만하고, 남북한이 서로 교류하고 협력하자는 점을 합의했고, 적십자 회담을 통해 이산가족 상봉 실현을 약속했다. 비록 7∙4 공동성명이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이 때 합의한 원칙들이 이후 1985년의 경제회담, 1991년의 남북기본합의서, 2000년 6·15 공동선언을 통해 진화하고 발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