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1987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하얀 눈이 내리면서 밝은 새해 1월. 짧지만 매우 중요한 기사가 한 일간지에 실렸습니다.
14일 낮 12시 쯤 공안사건과 관련,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연행돼 조사를 받던 서울대생 박종철군(21ㆍ언어3)이 쓰러져 병원에 옮겨졌으나 숨졌다. 경찰은 박군의 사인을 일단 쇼크사로 검찰에 보고했으나 검찰은 박군이 경찰의 조사과정에서 가혹행위로 숨졌을 가능성에 대해서 자체수사를 펴고 있다. 경찰이 발표한 박군의 사망경위에 따르면 이날 박군은 상오8시10분쯤 서울 관악구 신림9동 246의 26 박군의 하숙집에서 경찰에 연행된 뒤 9시16분쯤 경찰이 제공한 콩나물국과 밥으로 아침식사를 했는데 『어제밤 술을 너무 많이 마셔 밥맛이 없다』며 냉수 몇 컵을 요구해 마셨다는 것이다. 이어 10시 50분 쯤부터 수사관의 신문을 받기 시작, 11시 20분 쯤 수사관이 수배된 박모군(서울대생)의 소재를 물으면서 책상을 세게 두드리는 순간 의자에 앉은 채 갑자기 『윽』 하는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는 것이다. 경찰은 곧바로 박군을 용산의 중앙대 부속병원으로 급히 옮겼으나 이날 낮12시쯤숨졌다. 경찰은 『박군을 조사할 당시 수사관의 가혹행위는 절대로 없었다』로 밝혔다.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이날 『현단계에서는 무어라 말할 수 없으나 박군의 시체부검결과에 따라 정확한 사인을 규명해 사실대로 밝히겠다』고 말했다. 한편 박군의 시체부검이 15일 하오 9시 5분부터 10시 25분까지 한양대병원 영안실에서 서울지검형사부 안상수검사의 지휘와 황적준박사의 집도로 실시됐다. 부검결과 의표검사상 특이한 소견은 없었지만 왼쪽무릎에 0.6cm의 찰과상이 발견됐다는것이다. 또 내경은 오른쪽 폐에서 출혈반이 나타났지만 어떤 이유에 의해서 출혈반이 생겼는지는 병리조직검사및 동물실험결과가 끝나는 7~10일 이후에야 판명될 것으로 보인다. 부검현장을 지켜본 박군의 숙부 박월길씨 (36ㆍ경남양산 새마을지도자)는 『조카가 가혹행위를 당해 숨진것 같다』고 전했다. 시체부검이 끝난 박군의 시체는 하오11시쯤 국립경찰병원 영안실로 옮겨졌고 아버지, 형, 숙부 등 가족 10여명이 영안실에서 밤을 지샜으며 어머니 정차순씨(54)는 충격으로 쓰러져 이 병원 별관 4층 612호실에 입원했다. 박군의 시체는 16일 상오 8시 25분 쯤 장의버스에 실려 벽제장제장으로 옮겨져 화장됐다. 박군은 지난 85년 5월 24일 가두시위와 관련, 관악서에서 연행돼 구류 5일을 받았으며 지난 해 4월 11일에는 집시법 위반혐으로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박군은 또 지난해 10월 31일 서울대광장에서 열렸던 교내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박군은 부산 토성국교, 영남중, 혜광고교를 나왔으며 아버지 박정기씨(57ㆍ양수장 고용원ㆍ부산시 청학동 341의 31)의 월수입이 많지는 않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운 편은 아니었다는 것. 아들의 사망소식을 듣고 상경한 아버지 박씨는 평소 『종철이가 명랑하고 쾌활했는데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고 울먹였다.
정구영 서울지검장은 16일 박종철군 사망사건과 관련, 『모든 내용을 신속하도고 정확하게 규명, 국민들로부터 의혹을 사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말하고 『경찰관들의 고문사실이 드러나면 관련자 모두를 엄중처벌하겠다』고 밝혔다. 정검사장은 이어 『시체부검결과는 앞으로 3~4일 뒤에나 나올것』이라며 『다음주 초에는 이 결과를 토대로 박군 사망의 상세한 경위 및 수사방향 등을 발표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정권의 도덕성은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진실과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 알려지면서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 대학생이 고문으로 숨졌을 가능성을 보여준 기사가 나오자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박종철 군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지자 사건을 서둘러 수습하기 위해 정부는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책상을 친다고 사람이 죽은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당시 정권의 비리나 폭력성이 이미 많은 사건들을 통해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신뢰를 잃었을 것이다.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정부의 납득할 수 없는 발표는 많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고 고문에 대한 의혹은 더욱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 맨 처음 박종철 군의 사체를 검안했던 의사 오연상의 의견이 신문에 보도되었다.
속보 = 치안본부 대공수사 2단에서 조사를 받다 숨진 서울대 박종철군(21ㆍ언어학과 3년) 사건을 조사중인 검찰은 박군이 사망했을 당시 박군을 취조한 수사경찰관은 대공수사 2단 2과 소속 2명이라고 밝혔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박군의 사체부검결과 형사상 혐의가 드러날 경우 취조경찰관들을 연행, 조사할 방침이나 아직 부검결과가 나오지 않아 관련 경찰관들에 대한 강제수사는 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검찰은 박군의 부검결과가 나오는대로 관련 경찰관들의 신병을 넘겨받아 본격적인 수사를 벌일 방침이다. 이 사건 담당 안상수 검사는 17일 현재 방증 수집 등 기초조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군의 사체부검결과는 정확한 사인을 알아내기 위해 독극물실험실에 최소한 3, 4일이 걸리기 때문에 빠르면 18, 19일 경에 나올 것으로 보인다. 한편 15일 밤 박군의 사체부검에 입회한 한양대 마취과의사 박동호박사(49)는 16일 오후 『박군의 두피를 열자 뒷머리쪽에 피멍이 있었고 가슴부위 살갗이 벌겋게 변해 있었으며 가슴부위 피하층에 구슬크기만한 피멍이 여러군데 보였다』고 밝혔다. 박박사는 또 『복과 왼쪽허벅지 윗부분에도 직경 1cm 가량의 피멍이 2, 3개 있었다』고 말했다. 박박사는 『그러나 뇌는 일체 손상된 흔적이 없었고 그 밖에 다른 부위도 특별한 외상은 없었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14일 숨진 박군의 사체를 대공수사 2단 취조실에서 처음 검안한 중앙대 부속 용산병원 내과전문의 오연상씨(32)는 『14일 오전 11시 45분 경 박군을 처음 보았을 때는 이미 숨진 상태였고 호흡곤란으로 사망한 것으로 판단됐으며 물을 많이 먹었다는 말을 조사관으로부터 들었다』고 밝혔다. 오씨의 말은 박군의 사망 경위와 관련, 경찰이 밝힌 『14일 오전 10시 51분 경 신문에 들어갔는데 신문도중 박군이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며 쓰러져 중앙대부속병원으로 옮겨졌으나 12시경 숨졌다』는 내용과 서로 엇갈렸다. 오씨는 자신이 조사실에 도착 했을 때 박군은 조사실 간이 침상 위에 반듯이 누운 채 3명 가량의 수사관으로부터 입으로 하는 입대(對)입 인공호흡을 받고 있었다고 말했다. 의사 오씨는 『도착 즉시 박군을 검진한 결과 동공이 모두 열린 채 호흡과 맥박이 없었으며 변을 배설한 것으로 보아 항문도 열려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등 이미 사망한 것으로 판단되는 여러가지 징후가 명백히 나타나 있었다』고 말했다. 오씨는 이 검안에서 『외상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고 사망시 등에 들리는 수포음이 전체적으로 들렸다』고 적었다. 오씨는 또 검진 당시 수사관들이 『중요한 사람이니 꼭 살아야 한다』, 『살려달라』는 말을 몇차례 했고 사망선고를 한 뒤에도 병원으로 데려가 계속 진료해 줄 것을 요구, 낮 12시 40분 경 응급실로 데려갔으나 사망이 이미 확인된 뒤여서 박군의 사체는 중앙대 용산병원 이송 5~10분 쯤 뒤 경찰병원 영안실로 옮겨졌다고 말했다. 오씨는 오전 11시 45분 경 조사실에서 도착했을 당시 박군은 바지만 입은 채 웃옷이 벗겨져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며 약간 비좁은 조사실 바닥에는 물기가 있었다고 말했다. 박군이 있던 조사실은 대공수사 2단 5층에 있는 약 2평 크기로 방안에 책상 1개와 간이침대 1개, 양변기 등이 있었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말한 것이지만 박종철의 죽음이 고문에 의한 것임을 사람들은 확신하게 되었다. 파문은 일파만파로 퍼져 나가고 언론은 연일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정부는 고문치사를 인정하고 고문에 가담한 경찰 두 명을 사법처리했다. 하지만 끝까지 그들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서울대생박종철군의 고문치사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경악을 안겨주었다. 박종철군의 고문치사사건은 지금까지 구속자나 구속자 가족들에 의해서 주장돼온 숱한 고문사례의 한 가지이지만 그것이 죽음에 이르렀다는데 문제의 중요성이 있다. 물론 지금까지 제기된 숱한 고문사례의 진위여부가 객관적으로 확인된 것은 적었다. 고문뿐아니라 구치소나 교도소 내에서의 수감자에 대한 가혹행위, 농성근로자들이나 학생들에 대한 경찰의 폭행 등의 행위도 수없이 시비가 일었으나 진상이 호소자들의 의사대로 속시원히 밝혀진 것도 드물다. 이런 어정쩡한 수사태도가 급기야 박군고문치사사건으로 이어져 이제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것이 여론의 주류를 이루게끔됐다. 그동안 감추어졌던 사례들을 피해자나 가족들의 소소를 통해 집약해보면 우리의 고문실태를 실감할 수 있다. 85년 9월에 발생한 민청련 의장 김근태씨(39)에 대한 고문말썽은 김씨의 부인 인재근씨(35)가 각계에 보낸 호소문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치안본부에서 고문당한 남편의 고통을 호소합니다.」는 이 호소문에서 인씨는 『남편은 9월 4일에 2차례, 5ㆍ6일에 1차례, 8ㆍ11ㆍ13ㆍ16ㆍ20일 등 10여 일 동안 10여 차례 온몸을 꽁꽁?인 상태에서 전기 고문, 물고문, 고춧가루물 먹이기, 소금물 먹이기 등 갖은 고문을 당했다고 합니다. 하루에 5~7시간씩 고문을 했고 잠을 거의 재우지 않았답니다. 검찰청에서 잠깐 만난 남편의 발뒤꿈치는 짓이겨져있어 저의 가슴을 미어지게했습니다.』고 주장했다. 인씨의 폭로는 즉각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한국기독교회협의회(KNCC) 인권위 사무실에서 항의농성이 벌어졌고 재야 각 단체에서 항의성명이 발표됐다. 비슷한 시기에 민청련정책실장 이을호씨와 전학련삼민투위원장 허인회, 깃발사건관련 문용식씨 등이 고문을 당했다는 주장이 터져나왔다. 특히 이을호씨의 경우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정신이상을 일으켜 서울시립병원에 감정유치되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주장이 부인 최정순씨에 의해 제기됐다. 최씨는 『남편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서 23일동안 조사를 받는 동안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고문을 당해 정신이상을 일으켰다.』고 주장했다. 이씨는 최근 형집행정지로 석방됐으나 아직도 정신착란증세를 보이고 있으며 주위사람들에게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이 가장 참기 힘들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고문으로 정신이상을 일으킨 것으로 주장된 사건은 이을호씨 외에도 84년 11월 서울대 프락치사건으로 구속된 서울대생 심윤남군(23ㆍ철학2)과 건국대사건관련 구속자 김동철군(21ㆍ한신대2) 등이 있다. 김군은 석방된 뒤 친구들에게 『사실대로 불지 않으면 밤새워 때리겠다.』고 말하는 등 정신이상증세를 보여 용인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이다. 5ㆍ3인천사태를 전후하여 수사기관에 연행돼 조사를 받았던 근로자 학생들도 심한 고문을 받았다고 가족들은 주장하고 있다. 86년 5월 연행돼 조사를 받았던 한일공업해고근로자 김문수씨(36) 등 서울노동운동연합관련자 14명에 대한 가혹행위수사가 그 대표적인 예. 김씨의 부인 설난영씨는 대한 변협에 보낸 진정서에서 『구속자들은 무자비하게 구타당하고 짓밟혔다. 야구방망이로 온 몸을 맞았다.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고춧가루 물을 코와 입에 들이붓는 고문을 당했다.』고 말했다. 신민당의 인천사태보고서 가운데도 구속자들에 대한 고문사례가 있다. 신민당조사단은 이 보고서에서 ▲양발과 양손을 모두 수갑으로 채우고 그 아래 위의 수갑을 끈으로 묶은 뒤 그 끈사이에 끼운 침대봉을 이용, 사람을 책상과 책상사이에 매달아 놓고 발로 찼음(별명 통닭구이) ▲야구방망이로 발바닥 정강이를 때렸음 ▲여자의 경우 하복부 같은 곳을 발로차 고통과 모욕감을 주었음 등 14개 유형의 고문사례를 제시했다. 지난해 6월의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은 이미 널리알려진 사실이고, 이밖에도 3월달의 백산서당 보임사 사건 관련구속자 김상복씨 등 11명에 대해 물고문 전기고문시비가 있었고 80년이후의 시국관련 사건구속자 거의 모두에 대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고문시비가 꼭 뒤따랐다. 최근에는 구속된 학생ㆍ노동자ㆍ농민 등의 시국관련구속자의 수가 2천5백여 명에 이르면서 구치소와 교도소 안에서의 교도관들에 의한 집단폭행과 고문ㆍ무더기 금치 등의 인권유린사태가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KNCC인권위원회는 86년도 인권주간자료집으로 펴낸 「민주쟁취와 인권」이란 책자에서 86년 한해동안 전국의 교도소와 구치소에서 발생한 재소자 인권침해사례 1백여 건을 일지형식으로 싣고 있다. 「머리가 터져 꿰매고 눈위가 찢어지고 정신착란이 일어나고 집단폭행을 당하고 기절하고 안경이 깨지고……」(KNCC인권위「민주쟁취와 인권」). 이 책자는 이같은 구치소 내 인권유린사태는 서적차입제한철폐 불량부식개선 등 재소자 처우개선문제와 구치소 관계자들의 폭언 등에 재소자들이 항의하면서 유발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번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 사건과 관련, 지난해 발생했던 인천연안가스 신호수씨변사사건과 삼민투용의자로 수배를 받아오던 서울대생 우종원군의 변사사건, 부산송도앞바다 속에서 발견된 서울대생 김성수군 변사사건 등이 이미 수사가 완결됐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들먹거리고 있다. 우종원군은 경찰의 수배를 받던 중 지난 85년 10월 11일 경부선 영동-황간역사이 철도변에서 투신자살한 시체로 발견돼 그 이튿날 화장됐다. 인천연안가스 신호수씨의 경우 지난해 6월 11일 인천시 남구 도화동 주유소에서 서울대공수사과에서 근무한다고 신원을 밝힌 경찰 3명에게 연행된 뒤 1주일 뒤인 6월 19일 신씨의 고향근처인 전남 여천군 평사리 대미산 굴바위 밑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됐었다. (신씨의 아버지 정학씨가 낸 진정서). 이런 진정호소가 모두 사실일 수는 없다. 그러나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는 시각으로 많은 시민들이 수사나 조사를 지켜본다면 수사당국에 대한 신뢰도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를 없애기 위해서는 고문이 종식되어야 한다.
마침내 사람들은 2월 7일 "고 박종철 국민추도대회"와 3월 3일 '49재 추모행사'를 통해서 정권에 대한 분노를 드러냈고 폭력정권 퇴진을 요구했다. 정부는 두 행사를 공권력공권력국가나 공공 단체가 우월한 의사의 주체로서 국민에게 명령하고 강제할 수 있는 권력을 동원해 탄압했다. 하지만 민주화를 원하는 시대의 흐름은 막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