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당국과 기업주들은 전태일과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인간, 최소한의 요구'를 기만하고 묵살하였다. 전태일에게 더 큰 결단을 하도록 강요했다. 전태일은 어쩔 수 없는, 마지막 선택을 강요받는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理想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生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의 결단을 내린 이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 치오니 하나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 전태일의 1970년 8월 9일 일기 <전태일 평전> 중에서
사랑하는 친우여, 받아 읽어주게. 친우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주게.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버린다고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에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그리고 만약 또 두려움이 남는다면 나는 나를 영원히 버릴 걸세. 그대들이 아는, 그대 영역(領域)의 일부인 나. 그대들의 앉은 좌석에 보이지 않게 참석했어(해서) 미안하네. 용서하게. 테이블 중간에 나의 좌석을 마련하여주게. 원섭이와 재철이 중간이면 더욱 좋겠네. 좌석을 마련했으면 내 말을 들어주게.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체.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어찌(쩌)면 반지의 무게와 총칼의 질타에 구예(애)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않기를 바라는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전태일은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를 외치며 근로기준법 책과 함께 불꽃으로 타올랐다. 병원으로 옮겨진 전태일은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며 친구들에게 당부했다. 어머니 이소선에게는 "내가 이루지 못한 뜻을 꼭 어머니가 이루어 주세요?" 하며 부탁했다. 이소선은 목이 메어 아들의 부탁에 답을 하지 못했다. 전태일은 "크게, 크게 대답해 달라"고 어머니께 애원했다. 이소선은 힘겹게 "그래, 아무 걱정마라.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기어코 내가 너의 뜻을 이루마" 라고 약속했다. 이소선의 맹세에 전태일은 "역시 우리 어머니야" 하며 숨을 헐떡이면서도 좋아했다. 그날 밤 10시가 넘어 전태일은 어머니께 "엄마, 배고프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전태일은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길에서 한줄기 불꽃으로 타올라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갔다.
1970년 전태일의 외침은 해방이후 한국사회에 던진 최초의 '인간선언'이다. 사람보다는 돈과 권력이 최고의 가치로 평가받는 물질만능과 경쟁으로 얼룩진 오늘날 한국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정신이 바로 전태일의 '인간선언'이다.
엄마. 배고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