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보는 부마항쟁

부산∙마산의 유신반대운동

마산의 민주화운동
1979 부마항쟁마산의 민주화운동

재경학우회 심포지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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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대학보 (사회과학연구소 관련 정성기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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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대학보 (사회과학연구소 관련 정성기 증언)

(전략) … 세계에 대한 체계적 인식에 있어서 최초의 충격을 준 것은 당시 서울의 대학가에서 은밀하게 베스트셀러가 되어온 이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였다. 주로 미 국무성의 공식 자료를 통해서 중국과 월남의 공산화 과정을 보여주는, 지금까지 학교에서 배워온, 그리고 대학에 와서도 들어오는 정부의 논리가 엄청나게 허구적임을 보여주었다.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옳다고 믿었던 진실의 체계를 무너뜨리고 지금까지의 허구를 새로운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엄청나게 고통스러워 깡소주를 퍼마셔야 했다. 충격은 계속되었다. 노동문제를 공부하다가 70년 청계천의 한 노동자 전태일이 정부와 자본가에 대해 「근로기준법을 지켜라」고 절규하며 분신한 사건을 접하고는 분노의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고 내 가슴에 서서히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78년 그 해에 일어난 동일방직 사건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탄압에 맞서 알몸으로 대항하고 경찰, 자본가와 합작한 어용노조는 이들에게 오물을 퍼부은 사실을 접하고는 나는 이 찬란한 고도의 경제성장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 성장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나는 드디어 이 권력이 독재권력이며 이 오만한 권력자와 가진 자들이 한편이며 이들은 인간이 아니라고 단정을 내렸다. … 2학기에 들어서는 그간 방학 때마다 세미나를 해 오던 고교 동문들 중 일부와 그 외 일부 선배와 함께 일상적으로 활동하는 학습 서클을 만들었다. 「사회과학연구회」라 이름붙인 이 모임은 경남대 최초의 「이념서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하략)

마산에서는 1970년대 중반부터 민주화의 열기가 서서히 달아올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주도하는 인권을 위한 기도회 등이 월남성당에서 열렸다. 이 무렵 재경마산학우회는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학술심포지엄, 강연회, 야학, 소모임 등을 통해 문제의식을 확산해 나갔다. 1976년에는 마산 출신의 대학생들이 모여 마산학생연극회를 결성하고 사회성 짙은 공연을 하기도 했다. 경남대학에서는 이윤도가 주도하여 극예술연구회를 결성했고, 1977년에는 이윤도, 박진해 등이 중심이 되어 마산오광대복원추진위원회를 조직, 설맞이 지신밟기를 했으나 경찰의 방해로 중단되기도 했다. 1978년에는 재경마산학우회의 소모임에 참여했던 경남대학생들이 경남대 최초의 이념서클 사회과학연구회를 결성하였다. 사회과학연구회에서는 매달 읽을 책을 정해 공고하고 독서와 토론을 통해 사회문제를 고민하였다.

마산의 양서협동조합(집현전)

집현전(회지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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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양협(집현전)은 1978년 8월 12일 창립하였다. 지역사회의 현실을 진단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성의 집결처로서 독서, 토론, 연구를 표방하였다. 회원들은 재경마산학우회를 주도하던 서울유학생, 경남대 사회과학연구회 회원, 이윤도씨 주변의 노동자들, 완월성당 대학생들이 중심이 되었다. 회원은 128명으로 시작했는데 마산시 장군동에 집현전이라는 직영서점을 개설하고 회원과 일반 이용자를 위한 양서 구매, 도서대출, 사회봉사, 장학사업, 문화예술사업 등을 펼치고자 했고 목요세미나, 김지하 문학의 밤, 3·15기념행사 등을 개최하였다. 마산 양협은 활발한 활동으로 마산 민주화운동의 광장 구실을 했으나 재정이 어려워 1979년 7월 아쉽게도 활동을 마감하였다.

질문 마산 양협의 이름인 집현전은 어디서 따온 것일까?
해답

세종대왕이 학자들을 모아 한글을 연구하게 한 집현전에서 이름을 따서 마산 양협의 이름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