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5년 황해도에서 선비 이경선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한문을 배우며 과거시험을 준비하다 1894년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가 세운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개화사상을 접하였다. 청년시절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898년 군주제군주제세습 군주(왕)가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 형태를 폐지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아 5년 8개월간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1904년 미국 유학을 떠나 프린스턴 대학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한 후 주로 미국과 국제연맹을 대상으로 외교활동을 하였다.
1919년 3ㆍ1운동 후 한성임시정부, 뒤이어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표로 추대되었으나, 1921년 국제연맹에 위임통치위임통치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인 영국·프랑스·일본 등이 독일·터키의 식민지 및 여기에 준하는 영토에 대해서 국제연맹의 위임을 받아 행한 통치형태를 요청한 사실이 드러나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1945년 해방 후 귀국하여 우익우익전통적인 것을 옹호하며 유지하려는 또는 한 나라나 민족이 지닌 장점을 강조하려는 경향 또는 단체 자유주의진영의 지도자로 활동하다 1948년 제헌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1,2,3대 대통령으로서 12년간 자유민주주의, 반공반공공산주의에 반대함주의, 반일정책, 북진통일정책 등을 중심으로 정부를 이끌다가 1960년 4ㆍ19혁명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하와이로 망명, 1965년 사망하였다.
1948년 국회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구성하여 일제식민지 시기 친일친일일제 식민지시기 그들의 침략ㆍ약탈 정책을 지지ㆍ옹호하여 따름 활동을 했던 사람들을 조사하여 처벌하기 시작하였다. 국민들은 반민특위 출범에 뜨거운 관심을 보이며 적극적으로 친일 혐의자에 대한 신고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친일파들은 반민법 제정에 앞장선 위원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이며 위원회의 조사활동을 방해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승만대통령도 지금은 공산주의와 싸우는 것이 급선무라며 과거의 잘못으로 유능한 사람을 처벌할 수 없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본경찰 출신 경찰요원이 반민특위를 습격하는 등 탄압이 가해지면서 결국 반민특위 활동은 무력화되었고 곧이어 반민특위는 해체되고 말았다. 그리고 반민족 행위 혐의로 조사받은 680여 명 중 1950년 3월까지 단 7명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이들도 1년 내에 모두 풀려났다.
전쟁이 남긴 상처는 너무나 컸다. 산업시설의 파괴뿐만 아니라 물가 부족으로 인한 물가폭등은 국민들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전쟁 등으로 어려워진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미국의 경제 원조를 적극 활용하였다. 미국은 1945년부터 1961년까지 여러 가지 형태의 원조를 한국정부에 제공했다. 1950년대 전반기까지는 식료품 등의 소비재 중심의 구호원조였고, 전쟁 후에는 군사 원조적 성격이 강했다. 이 가운데 농산물이나 농업 용품, 밀가루, 설탕, 면화 등 소비재 공업 원료가 중심이었던 구호원조는 부족한 물자 문제를 해결하고 면직면직목화솜을 주원료로 하여 짠 직물ㆍ제분제분곡식을 빻아서 가루로 만듦. 특히 밀을 밀가루로 만드는 일을 가리킴. ㆍ제당제당설탕을 만듦. 등 소비재 공업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하지만 미국의 경제원조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먼저, 무상으로 도입된 농산물의 경우 미국이 과잉 생산으로 누적된 자국의 농산물 재고를 원조라는 명목으로 처리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잉여잉여쓰고 난 후 남은 것. 나머지농산물의 도입으로 국산 농산물의 가격이 떨어져 농민들이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농민들은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동하였고 도시에는 실업자실업자경제 활동에 참여할 연령의 사람 가운데 직업이 없는 사람가 급격히 늘어났다. 더불어 전쟁고아와 도시빈민 등도 눈에 띄게 증가했다. 또 다른 문제점은 정부가 원조물자와 자금을 공평하게 분배하지 않으면서 발생하였다. 불공평한 분배의 결과 재벌이라는 대기업이 형성되었고, 중소기업 등의 설자리는 줄어들었다. 밀가루, 설탕, 면화 등의 원조물자는 배당받는 것 자체가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었는데, 대기업에 거의 독점적으로 배정되었다. 또한, 미국이 경제원조를 기반으로 한국의 경제 정책에 깊숙이 관여하기도 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인민군의 공격을 시작으로 발발한 6ㆍ25전쟁은 남ㆍ북한 모두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사망ㆍ부상ㆍ행방불명 등 수십만 명의 피해자가 발생했고, 수많은 어린이들이 전쟁고아가 되었으며 가족과 흩어진 이산가족이 1,000만 명이 넘었다. 국토는 황폐화되고 산업 시설, 도로, 주택, 철도, 항만 시설 등이 대부분 파괴되어 엄청난 경제적 피해를 입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사흘 만에 서울이 점령될 정도로 전쟁은 준비된 인민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북한의 예상과 달리 참전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미국이 즉각 전쟁에 개입하였고, 미국을 중심으로 16개국이 참여한 국제연합군(유엔군)이 참전하면서 전세전세전쟁의 형세나 형편가 바뀌기 시작하였다.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비롯한 이북 지역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전쟁 초기 승리를 거둔 북한군은 점령지역에서 토지개혁이나 노동법령의 개정과 같은 북한식 개혁을 하면서 지주나 공무원 등을 처형하였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탈환하자 반대로 북한군에 협력한 사람들에 대한 처형이 뒤따랐다. 민간인 학살도 일어났다. 해방 후 좌익좌익급진적이거나 사회주의적·공산주의적인 경향을 띤 개인이나 단체를 일컫는 말. 1792년 프랑스 국민 의회에서 급진파인 자코뱅당이 의장의 왼쪽 의석을 차지한 데서 나온 말 활동을 한 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가입시켰던 보도연맹의 경우 무장봉기무장봉기지배자의 무력에 대항하여 피지배자가 무장을 하고 떼 지어 세차게 일어나는 일 위험을 사전에 봉쇄봉쇄굳게 막아 버리거나 잠금한다는 차원에서 수 만 명을 처형했다. 경남 거창과 충북 영동의 노근리 등 여러 곳에서 주민들이 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1950년 10월 13일, 중국 공산당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국군과 유엔군이 다시 한강 남쪽으로 후퇴하였다. 다시 서울까지 밀렸을 때 17세에서 40세 사이의 남성 민간인 50만 명이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되었다. 이들은 한겨울에 식량과 군복, 막사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수만 명이 얼어 죽거나 굶어 죽었다. 이후 38도선 부근에서 서로 밀고 밀리며 공방전공방전서로 공격하고 방어하는 싸움이 이루어지다 결국 1953년 7월 27일, 휴전상태에서 종전종전전쟁이 끝남. 또는 전쟁을 끝냄.협정이 아닌 정전정전교전 중에 있는 쌍방이 합의에 따라 일시적으로 전투를 중단하는 일협정이 체결되었다.
해방 당시 남한 인구의 7할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였으나 내 땅을 가지고 있는 농민의 수는 많지 않았다. 따라서 원활한 국가 운영을 위하여 자작농자작농자기 땅에 자기가 직접 농사를 짓는 농민의 수를 늘려야 할 필요가 있었고 따라서 1950년 3월, 농지개혁법안을 공포하였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구당 3정보정보땅 넓이의 단위로 1정보는 3,000평으로 약 9,917.4㎡에 해당를 초과하는 땅은 국가에서 유상유상보상이 있다는 뜻으로 국가에서 돈을 주고 땅을 삼으로 매입한다. 땅값은 연간 수확량의 150%로 하되, 농지를 분배받은 농민은 이를 5년간 나누어낸다. 정부는 지주지주토지의 소유자에게 지가 증권지가 증권토지개혁 때 정부에서 사들인 토지의 보상금으로 지주에게 발행한 증거문서을 주어 산업에 투자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이것은 정부가 농지 개혁의 방식을 '유상 매입 유상 분배'로 하고, 지주자본을 산업 자본으로 전환하여 산업 발전의 계기로 삼고자 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농지개혁으로 사회적 지배계급으로서 지주는 사라지고, 상당수의 농민들이 자신의 땅을 가지고 직접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농지개혁이 실제적으로 적용되기까지 시간이 지체되면서 일부 지주들이 땅을 팔아 농지 개혁의 대상이 되는 토지가 크게 줄어들거나, 전쟁 등으로
인플레이션인플레이션화폐 가치가 떨어지고 물가가 계속적으로 올라 일반 대중의 실질적 소득이 감소하는 현상이 심해지면서 토지 대금을 생산물로 납부해야 하는 방식이 농민들에게 큰 부담을 주기도 하였다. 결국 이를 감당하기 어려운 농민들은 분배받은 농지를 다시 팔고 소작을 하거나 도시로 떠나는 경우도 있었다.
독립이 분단으로, 분단이 전쟁으로 이어지는 어려운 시간을 겪으면서도 대한민국에는 희망을 주는 새로운 변화가 생겨났다. 첫 선거인 5ㆍ10 선거5ㆍ10 선거1948년 5월 10일에 제헌국회를 구성하기 위해서 실시한 국회의원선거를 통해 21세 이상의 모든 남녀에게 투표권이 주어지고, 헌법에서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라고 규정하여 성별이나 종교 등에 관계없이 모든 성년이 1표씩 행사하는 보통선거가 제도화되는 등 법 앞의 평등이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또한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생각이 확산되면서 교육이 가장 확실한 계층 상승 수단으로 인식되면서 교육열이 높아졌다. 도시와 농촌을 막론하고 수많은 학교가 세워졌고 취학률취학률학교에 다닐 나이가 된 어린이 수에 대하여 교육을 받기 위하여 실제 학교에 들어간 어린이 수의 비율이 높아지면서 뛰어난 인재들이 많이 양성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1960년대 이후 경제 성장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민주주의 실천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분단으로 인해 이남과 이북에 두 개의 정부가 세워졌고 각각 자신을 중앙정부라고 주장하면서 상대를 비난했다. 심지어 전쟁을 해서라도 통일을 이루겠노라고 주장하는 위태로운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남북 모두 민주주의는 크게 후퇴하고 말았다. 이승만대통령은 국민들의 기대와는 달리 나라의 민주적 기틀을 확립하기보다 자신의 권력연장을 위해 헌법 개정을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전쟁 와중에 전쟁이라는 특수상황을 이용하여 헌법 개정에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을 위협, 구속하거나,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중임거듭 그 자리에 임용함 제한을 철폐한다'로 헌법을 마음대로 개정하였다. (이 헌법 개정안은 국회에서 정족수정족수국회가 정책을 결정하는 데에 필요한 최소한의 출석 인원에 한 표가 모자라 통과되지 못했으나 국회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명이므로 사사오입사사오입반올림하면 135표가 개헌개헌헌법을 고침안 통과선’이라는 억지논리로 통과시켜버렸다.) 나아가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정치권의 새로운 차세대 인물로 떠오른 '조봉암'이 권력의 위협을 느낀 이승만 정권에 의해 간첩죄로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또한, 정부를 비판하는 신문(경향신문)은 폐간되었으며, 사회 통제를 위해 '국가보안법국가보안법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활동을 규제하도록 제정한 법률'을 단독으로 통과시키기도 하였다.
반민특위 구성되다!
경제를 살리기 위한 방법이 미국의 경제 원조를 받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