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보는 6월민주항쟁

제5공화국과 폭압정치
1987 6월민주항쟁제5공화국과 폭압정치

두개의 방어벽 <정의사회구현과 복지사회건설>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사람들은 유신체제의 폐지와 정치, 사회의 민주화를 기대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뒤를 이은 전두환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처럼 군인 출신이었으며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단독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헌법이 바뀌었지만 역시 군부 정권이 탄생한 것이다. 제5공화국 정부에 대해 알아보자.

정의사회구현

하지만 5공화국 정부는 겉으로 유화정책을 내세웠을 뿐 여전히 인권을 유린하고 폭력적 행정을 이어가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삼청교육대'다. 사회악 일소를 위해 불량배를 재교육시켜 사회에 다시 내보낸다는 명목으로 폭력배뿐만 아니라 5ㆍ18 관련자와 일반 시민도 다수 끌고 가서 비인간적인 대우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후유증을 앓게 되었다. 그리고 언론을 통폐합하여 정부의 입장만 대변하고 국민들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는 언론으로 길들였다. 실제로 정부는 보도지침을 통해 국민의 알권리를 제한하고 언론사를 통제해 왔던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복지사회 건설

복민주화 요구를 억압하고 광주에서 많은 사람을 죽이며 탄생한 5공화국 정권은 사람들에게 정권의 폭력성을 감추고 사람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다양한 유화정책을 선보인다. 대규모 예술제인 국풍 81, 중고등학생의 교복과 두발 자유화, 애마부인과 같은 자극적 오락영화 제작과 상영, 통행금지 해제, 국민들이 열광했던 야구의 프로출범, 컬러 TV 보급 등이 이루어졌다.



부정과 부패

국민들은 전두환 정권의 유화정책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대통령 친인척 비리 사건으로 정권의 도덕성과 청렴성에 강한 불만과 불신을 갖게 되었다.



  • 투신자살한 범양상선 박건석 회장의 영결식 [사진원본보기]

    범양상선(주)의 회장 박건석이 1조원에 달하는 부채를 안고 있으면서도 1,800만 달러(150억)의 자금을 해외로 도피시킨 사실이 밝혀지면서 재벌 비리에 대한 비난의 여론이 빗발치는 와중에 박건석이 돌연 자살한 사건

  • 새마을 비리 첫 공판이 이루어지는 날 인창상가 상인 및 민가협 회원들이 시위를 벌이는 모습 [사진원본보기]

    친인척 비리문제는 5공화국 내내 문제가 되었다. 영부인 이순자의 세새대 육성회, 심장재단, 사돈 이규동의 대한노인회, 동생 전경환의 새마을운동 중앙본부 등이 그 대표적인 것들이었다.

  • 5공비리 수사에서 노량진 수산시장 운영권 탈취혐의로 전기환이 구속된 모습 [사진원본보기]

    전두환 대통령의 큰형인 전기환씨가 청와대 민정수석, 서울시장, 치안본부 간부, 현직고위 법관, 감사원 사무총장 등을 총동원하여 수산시장을 탈세와 수사로 협박하여 강탈한 사건.

  • 어음사기로 구속되어 2심 공판에 나온 장영자 [사진원본보기]

    전두환의 처삼촌 이규광(李圭光)의 처제였던 장영자는 육군사관학교 제2기 출신으로 중앙정보부 차장을 지낸 남편 이철희와 함께 권력을 배경으로 하고 은행의 무담보대출의 허점을 이용, 사기행각을 벌여 1981년 2월 ~ 1982년 4월 총 6404억원에 달하는 거액의 자금을 조성하였다.




폭압 정치와 저항

폭5공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은 점점 거세졌다. 국민들은 헌법개정 운동을 끊임없이 전개하였으며, 광주 항쟁을 진압했던 군대의 이동에 동의한 미국을 반대하는 운동도 벌였다. 계속된 국민들의 저항에 정부는 억압의 수위를 점차 높여갔다.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영장 없는 체포와 구금, 가택연금, 수사과정에서의 불법적 고문이 행해졌다. 독재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던 대학생들을 언론을 통해 좌경ㆍ용공으로 매도하면서 1,289명을 한꺼번에 구속한 건대사태건대사태1986년 10월 28일, 전국 26개 대학의 대학생 2,000여 명이 건국대학교에 모여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 결성식을 가졌다. 정부는 경찰 8,500여 명을 동원한 진압작전을 펴 1,525명을 연행하고, 이 중 1,289명을 대량으로 구속하였다. , 부천서 성고문 사건부천서 성고문 사건당시 부천경찰서(지금의 부천남부경찰서)의 경장이던 문귀동(文貴童)이 조사과정에서 당시 22세이던 대학생 권인숙을 성적으로 추행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당시 공권력이 추악한 방법까지 동원하여 민주화운동을 탄압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으며, 권력에 굴복하여 불의를 용인한 사법부와 언론의 부도덕한 모습까지 보여줬다. 또한 군사정권의 언론 통제 수단 보도 지침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 이 사건을 통해서 드러나는 등,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등을 통해 국민들은 비인간적인 정부의 형태에 분노를 터뜨렸다.



  • 창문에 "광주학살 책임지고 미국은 공개사죄하라"는 글귀가 적힌 종이가 붙여진 미문화원 [사진원본보기]

  • 명동에서 열린 부천 성고문 사건 시위에 참가한 많은 시민들의 모습 [사진원본보기]

5∙18광주민주화운동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광주에는 공수특전단을 내려 보내 작전명 '화려한 휴가'를 실행에 옮겼다. 유신헌법의 철폐, 전두환 퇴진, 김대중 석방을 외치는 시민들을 곤봉으로 내려치고, 대검으로 베고 끝내는 총으로 쏘아 잔인하게 학살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은 제대로 언론에 보도되지 못했고 광주시민들은 폭도로 몰린 채 스스로 무장하여 계엄군에 대항하다가 붙잡히거나 목숨을 잃었다. 광주에서의 진실이 제대로 알려진 것은 한 참 후의 일이다.



12∙12쿠데타와 서울의 봄

박정희 대통령 살해사건의 조사를 담당한 합동수사본부장은 보안사령관인 전두환 소장이었다. 1979년 12월 12일, 그는 이 사건을 조사한다는 구실로 정승화 참모총장을 불법 연행하는 등 군대를 이용해 권력을 장악한 12∙12 쿠데타를 일으켰다.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했던 김재규가 체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상계엄을 풀지 않고 정부 요직을 차지한 뒤, 1980년 5월 민주적인 정부 수립을 요구한 대학생과 시민의 시위를 군대의 힘으로 내리 눌렀다.



  • 보안사에 모여 기념 촬영한 12∙12 반란의 주역들 [사진원본보기]

  • 남대문에서 시청으로 향사는 대학생 시국성토 시위행렬 [사진원본보기]

  • "비상계엄령 해제하라"는 등 시국성토 관련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 중인 학생들 [사진원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