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절 가족사진 왼쪽부터 시계방향 아버지, 전태일, 동생, 어머니, 큰아버지
1948년 9월 28일 대구에서 태어난 전태일은 가난한 집안의 장남이었다. 아버지 전상수는 옷 만드는 기술자였는데, 조그마한 봉제공장을 운영하다 번번이 사업에 실패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머니 이소선도 병이 들었다. 한참 공부를 해야 할 전태일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돈벌이에 나섰다. 신문팔이, 구두닦이, 솔 장사, 여름이면 아이스케이크 장사, 비오는 날은 우산 장사와 같이 먹고 살기 위해 '거리의 천사'가 되었다.
(건실하기 때문에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으므로) 소년은 자기보다 두 살 아래 남동생을 데리고 동대문시장에 나가 솔장사를 시작하였던 것이다. 주로 주부들이 부엌에서 쓰는 솔, 조리, 방비, 적쇄 등 이런 여러 가지 물건들을 동네의 어떤 위탁 판매소에서 위탁으로 받아다 팔아서 원금은 돌려주고 이문(윤)금을 집안 식비에 충당했던 것이다. 그의 남동생도 3학년을 중퇴하고 소년을 따라 물건들을 조그마한 C레이쏜 박스에 담아가지고 동대문시장이나 중앙시장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행상을 하였던 것이었다. 식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영양분을 섭취할 수 없었기 때문에 키는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말라깽이 두 형제는 아침이면 C레이썬 박스에 솔, 조리 등을 담운고 시내 여러 골목과 시장들을 해가 지고 밤이 늦도록까지 헤매였던 것이다. 그 길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환경에 적용하여 병중에서 완전한 완쾌를 보지 못한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과 낙심으로 마음의 안정을 얻지 못하고 자기 자신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그들의 부친을 위하는 길이었다. 낮에는 이 거기 저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솔사려, 조리 방비 적쇄요, 쓰레박이나 삼발이요."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29쪽 가운데서
그전에 덕수궁에서 구두를 닦고 저녁에는 신문을 팔고 밤 1시 2시에는 야경군을 피해다니며 조선호텔 앞에서부터 미도파 앞 그리고 국립극장 앞, 그리고 명동 뒷골목을 쓸며 담배꽁초를 주어모아 팔아서 생개(계)를 유지하고 잠은 덕수궁 대한문 지금의 수위실에서 가마니를 덮고 잘 때도 눈물을 보(이)지 않아건만 오늘 저녁은 나도 모를 서름(설움)이 복받치는 구나? 사나히(이) 답지 못하게. 지금은 호위호식하는 편이 아니냐? 말이야. 과거를 생각해 봐라. 국립극장 앞 어느 당구장에서의 어떤 여자가 하던 말을 생각해 봐라. 비가 오는 날이여(었)지. 그 억센 비를 맞으며 하나라도 더 팔려고 우산 하는 소리에 한 거름(걸으)에 3층까지 뛰어 올라갔지. 우산 하나 얼마니? 네, 35원입니다. 왜? 35원이야. 30원주고 샀는데. 아녜요. 35원이면 본전밖에 안 됩니다. 밑지기는 뭐가 밑져. 애들은 왜 곳(곧) 죽는 소리야, 기분 잡치게. 아니 이거 헌 우산 아니야. 자루가 이에 머(뭐)야. 곰팡이가 쓸고. 이거 헌 거로구나. 아 아닙니다. 천만에요. 이건 분명히 저희가 이제 건(금)방 받아온 거야요. 변명은 말아, 너희들이 그런 지저분한 변명을 하니까 밤낮 그 모양 그꼴이야. [이 거지 같은 자식아] 그래요. 나는 태어날 때부터 거지에는(예요). 댁에는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도도한 집안에서 태어낫(났)고요. 내내 도도하십시요. 저도 한때는 남부럽지 않는 집에서 자가용 타고 남대문국민학교에 다녀답니다. 사람 팔자 시간 문제입니다.
불우한 가정환경 때문에 거리의 천사로 살아야 했던 전태일은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남대문 초등학교를 1년 남짓 그리고 청옥고등공민학교를 몇 달 다닌 것이 학력의 전부다. 하지만 한시도 배움의 꿈을 접은 적은 없었다.
마침내 생각대로 했다. 시청 뒤 보건사회부 옆 학원사 2층에 가서 연합중고등 통신강의록 중학 1권을 150원에 샀다. 이로써 희미해져 가는 배움의 정신을 내 마음 한 곳에 심한 타격을 줌으로써 다시 똑똑하게 그리고 단단하게 부(붙)들어 맨 것이다. 남은 다 하는데 나라고 못할 리가 어디 있어. 해보자. 그리고 내년 3월 달에는 꼭 대학입시를 보자. 앞으로 376일 남았구나. 1년하고 10일. 재단을 하면서 하루에 저녁 2시간씩만 공부하면 내년에는 대학입시를 보겠지. 해보자. 해라.
1967년 2월 20일 일기 가운데서
전태일은 1963년에 대구 청옥고등공민학교고등공민학교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사람에게 중학교 과정 교육을 실시하는 학교에서 보낸 몇 달의 시절을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하였던 시절'로 기억한다. 학교에서 김예옥이라는 예쁜 여학생을 만나 짝사랑도 했다. 아버지 일을 도와 다림질을 하며 영어단어를 외우다가 손을 데기도 하였지만 공부를 하는 게 마냥 즐거웠다.
청옥고등공민학교 시절 운동회 날이었다. 오래달리기를 하는데 남들보다 한 바퀴나 뒤졌다. 한 바퀴 뒤져 달리는 전태일이 마치 일등처럼 보이자 지켜보던 친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전태일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뛰었다. 전태일은 꼴찌라도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다. 물론 이 행복했던 시절도 가정형편으로 오래가지 못한다.
(제법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하루는 어머니께서 큰집에 다녀오시더니 나의 학교문제를 이야기 하셨다. 나는 뛸 듯이 기뻐(뻤)다. 앞산의 허여던 차가운 눈도 녹고 훈훈한 바람이 머푸라를 날릴 때 큰집 사촌 여동생이 다이(니)고 있는 대구시 명동국민학교에 세 들고 있던 청옥고등공민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남ㆍ여 공학으로써 선생님은 주로 대학 3, 4학년의 학생으로써 사대 학생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학교는 야간으로써 각 학년에 1학급씩 3학급 밖에 없었다. 내가 입학할 때는 진도가 2개월 가량 나갔으므로 나는 기초지식이 없어 영어와 수팍은 과목 중에서 제일 힘이 들고 이해하는 데는 무척 힘이 들었다. 그러지만 다른 과목은 다 재미있고 50분 수업시간이 너무 짧은 것 같았다. 정말 하루하루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 같았다. 우리 반에서도 나는 인기 있는 학생이었다. 아무리 과거에 국민학교를 졸업하지 못하였지만 서울에서 다니고 말을 조금 재미있게 하는 재능이 있었다. 그 당시 우리반 실장은 낮에는 철공소에 다니고 밤에는 학교에 다니는 모범학생이었다. 남ㆍ여 공학이라면 대부분이 실장은 남학생이 하고 부실장은 여학생이 하는 것이 학원적인 원칙인 모양이다. 우리 반도 예외는 아니였다. 부실장은 김예옥이라는 예쁘게 생긴 여학생으로써 반에서는 1, 2등을 다투는 수재였다. 나는 이 부실장이 좋았다. 얼굴도 곱게 생겼지만 공부도 잘하고 또 내가 하는 이야기는 총명하게 잘 이해하면서 내가 교단에 나가 이야기하는 보람을 가지게 했다. 다른 학생들 같으면 아무리 의문난 점이 있었도 질문하는 여학생은 한사람도 없는데 예옥이만은 곳잘 질문도 하고 사뭇 효(호)기심어린 눈으로 나를 주시하면서 나의 용기와 지혜의 도움이 되어 주었다. 나는 기초지식이 없어었으므로 다른 학생들이 놀 때도 모지라는 영어단어를 왜(외)어야 했고 수학공식을 왜어야 했다. 피나게 열심히 공부에 공부를 더한 나는 노력에 힘입어 우리 반 실장이던 박헌수가 학교에 못 다니게 되자 담임 선생님인 손선생님깨 나에게 실장의 임무를 주셨다. 내가 실장이 되자 어머니깨서는 눈물로써 기뻐하셨고 우리 집 가정은 일대 경사가 났다. 이때까지는 집에서 싹재(삯제)품을 하면서 공부를 했지만 실장이 되고부터는 무척 시간에 쪼기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하루 일과가 마치 기계처럼 꽉 짜여서 조금이라도 쉴 시간이 없었다. 아침 6시에 기상하면은 같은 반 학생인 재철이네집에 원섭이와 셋이 모여서 아령을 들고 역기를 들고 앞산 비행장까지 마라톤 연심(연습)을 했다. 앞산까지 뛰어갔다가 우리 집까지 오면 식사를 하고 그때부터 아버지께서 하시는 재봉일을 도와가면서 벽에 써 붙여둔 영어단어를 열심히 왜우는 것이다. 뜨거운 다리미질을 하면서 영어단어를 외우다가 손끝을 다리미에 닿으면 깜짝깜짝 놀라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였다. 그런 힘든 일 속에서도 실장이므로 특과활동이 많으므로 틈틈이 특과활동에 대한 준비도 계(게)을리 할 수도 없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다시 오후 4시반 까지 일을 계속하고 학교에 가면 그때가 하루 일과 중 제일 즐거운 시간이었다. 회상 수기 가운데서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