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로 보는 한일회담반대운동

1964년 한일회담 반대운동,
72일 간의 파노라마
1964 한일회담 반대운동1964년 한일회담 반대운동, 72일 간의 파노라마

한일회담은 1965년 8월에 마무리 되었지만, 1964년 한일회담의 구체적인 내용이 밝혀지면서 이에 반대하는 야당과 학생들의 움직임이 절정에 이르렀다. 3월 24일 서울대생들은 '한일회담 즉각중지'를 요구하는 집회를 갖고 이케다 일본 수상과 이완용의 화형식화형식불에 태워 죽임을 거행하였다. 5월에는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거행하며 한일회담을 반대하여 6월에는 절정에 이르렀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비상계엄비상계엄군사적 필요나 사회의 안정을 유지한다는 이유로 일정한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의 전부 또는 일부를 군대가 맡아 다스리겠다고 대통령이 발표한 명령을 선포하고 학생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하는 6.3사태를 일으켰다.

'민족적 민주주의'란?

소설가 김동리의 형이자 반공주의 지식인으로 유명한 김범부가 5·16쿠데타 직후 박정희 정권에 붙인 구호가 '민족적 민주주의'다. 박정희 대통령은 '반공'이란 용어대신 이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구호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군사 독재를 합리화하는 후진국형 사이비 민주주의에 불과한 것이었다. 뒤늦게 '민족적 민주주의'가 적절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박정희 정부는 그 표현을 '자유 민주주의'로 바꾸었다.




[ 슬라이드쇼 : 사진으로보는 1964년, 72일간의 파노라마 ]
  • 이케다 일본 수상, 김종필(제 2의 이완용) 화형식 [사진원본보기]

    1964년 3월 23일 김종필은 조만간 한일협정이 조인될 것이라고 강조하자 다음 날인 3월 24일 서울대 문리대에서는 두 개의 허수아비가 화형에 처해졌는데, 하나는 한일국교정상화의 파트너인 일본 수상 이케다, 또 하나는 '제2의 이완용'이라 불리는 김종필이었다.

  • 이것이 민족적 민주주의더냐 [사진원본보기]

    1964년 6월 25일 경기고등학교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한일회담반대를 소리높여 외치며 행진하였다. 이날 학생들은 '이것이 민족적 민주주의더냐'라는 글씨를 쓴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하여 박정희 정권의 '민족적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1964년 5월 20일 서울시내 9개 대학생 2천여 명이 서울대 문리대에 모여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치렀다.

  • 시청 앞에 모인 시위대 [사진원본보기]

    서울 시내로 몰려든 학생과 시민 약 5만여 명은 '무단정치 박정권은 민족을 위해 물러나라', '썩고 무능한 박정권 타도'를 외치며 청와대를 향해 파도처럼 밀려갔다.

  • 내란피고사건내란피고사건한일반대시위를 일으킨 학생들을 내란죄를 뒤집어 씌워 처벌하려 한 사건 [사진원본보기]

    1964년 6월 3일 시위에서 구속된 학생들에게 박정희 정권은 '내란죄내란죄정부를 뒤집어 엎으려 하거나, 국토의 한 지역을 함부로 차지하여 독립을 꾀하거나, 헌법을 어지럽히는 폭동을 일으키는 일로 인한 죄. '라는 (터무니 없는) 무거운 죄를 적용시켰다. 이 때 이명박 제17대 대통령도 구속되었다.

5단계로 본 1964년 한일회담 반대운동

  • 1단계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 2단계

    프락치의 감시와
    군인들의 협박

  • 3단계

    4·19혁명정신과 용공시비

  • 4단계

    박정희 정권의 퇴진 요구

  • 5단계

    6·3시위와 계엄령,
    그리고 전원석방

1단계.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다음은 1964년 5월 20일 서울 동숭동에 위치한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진행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및 성토대회성토대회잘못한 것에 대해 비판하는 시위'에서 발표된 글이다. 이 글은 당시 서울대 문리대 미학과 4학년이던 김지하의 작품이었다. 이 집회는 서울대, 동국대 등 5개 대학 한일 굴욕회담 반대 투쟁위원회의 연합조직 한일 굴욕회담 반대 학생총연합회가 주도하였는데, 4,000여 명의 대학생과 시민들이 참여하였다.



2단계. 프락치의 감시와 군인들의 협박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치른 5월 20일 밤, 장례식에서 김지하의 조사를 대신 낭독한 서울대 정치학과 3학년 송철원은 남산 중앙정보부중앙정보부박정희 정권 때 국가 안전보장에 관련되는 정보와 보안 범죄 수사에 관한 사무를 수행하던 기관. 에 끌려갔다. 중앙정보부는 정부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을 감시하기 위해 '프락치'를 이용하였다. 학생운동을 하는 학생 중에서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은 학생들에게 매월 2-3,000원씩 돈을 주어 동료 학생들을 감시하여 보고 하게 하였던 것이다. 송철원이 이런 사실을 폭로하였기 때문에 중앙정보부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풀려났다. 풀려난 송철원은 이와 같은 사실을 언론에 고발하였다. 이런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5월 30일 송철원을 고문한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자진출두 형식으로 검찰에 나타났다.

박정희 정권은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주최한 학생들을 전국에 현상 수배하였다. 5ㆍ20 시위로 연행된 학생들에 대한 구속 영장이 기각되자 21일 새벽 무장한 공수부대원들을 법원과 담당판사 양헌의 집에 보내 엄포를 놓기도 했다. 무장 군인들이 쳐들어와 "데모하는 놈들을 잡아 놓았으니 즉각 구속하라. 그렇지 않으면 수류탄을 터뜨려 여기서 죽여 버리겠다."며 협박하였다.

3단계. 4·19혁명정신과 용공용공산주의 주장을 받아들이거나 그 정책에 동조하는 학생. 시비

5월 22일 서울 시내 32개 대학 연합으로 조직을 재정비한 '한일굴욕회담반대학생총연합회'가 5월 25일 전국대학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난국타개궐기대회난국타개궐기대회어려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모임'를 열었다. 이날 학생대표들은 '구속 중인 애국학생 즉시 석방', '독점매판재벌의 엄단' 등을 요구하면서, 5월 30일까지 일주일의 냉각기간을 두고 그 기간 안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되지 않으면 4ㆍ19혁명 정신으로 실력행사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하였다.

5월 26일 정일권 국무총리는 관계 장관, 중앙정보부장, 검찰총장과 대책회의를 가진 직후, 학생들이 무질서하고 격한 행동을 삼가주기 바란다면서 계엄선포의 가능성을 내비쳤다. 내무부 장관은 20일 이후 데모에는 서울대의 용공색채가 큰 서클 학생들이 주동이 되었으며 일부 정치인과 혁신계 인사들이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다고 발표했다.

4단계. 박정희 정권의 퇴진 요구

5월 27일 전남대생들은 애국충정이 있거든 하야하야대통령에서 물러남로 보답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했다. 4ㆍ19혁명 이후 처음으로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구호가 학생시위에 등장한 것이다. 이날 서울대 전체교수협의회는 군의 정치적 중립과 학원의 자유보장, 구속학생의 석방, 학원자치에 위배되는 교육법 개정 등을 요구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한일회담 반대의 뜻을 밝혔다.

5월 30일 자유 쟁취 궐기대회를 연 서울 문리대생들은 박정희 정권의 타도 없이는 한일회담반대운동도 무의미하다는 구호를 외쳤다. 학생들은 오후 3시경부터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2, 30명으로 시작된 단식농성대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학생들의 처절한 단식투쟁은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시위를 전국적인 봉기의 양상으로 치닫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6월 1일이 되자 먼저 전북대생들과 청주대생들이 구속학생 석방과 박정희 정권의 하야를 요구하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6월 2일에 서울 시내 약 6천여 명의 대학생들이 반정부 성토대회를 열고 시내 곳곳에서 가두시위가두시위길거리에서 하는 시위를 벌였다.

5단계. 6·3시위와 계엄령, 그리고 전원석방

6월 3일은 아침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이날 서울에서는 한양대, 서울대, 고대, 연대, 동국대, 성균관대 등 18개 대학 1만 5,000명의 학생들이 시위에 나섰고, 수원에서는 서울 농대생 600여 명이 도보로 경수가도경수가도서울과 수원을 오가는 도로를 달려 서울로 들어왔다. 서울시내로 몰려나온 학생과 시민 5만여 명은 '무단정치 박정권은 민족을 위해 물러나라', '썩고 무능한 박정권 타도'를 외치며 청와대를 향해 파도처럼 밀려갔다. 오후 9시 40분, 대통령 공고 11호로 서울 일원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6월 4일 조간신문들의 지면은 정부의 공식적인 발표를 제외하고는 모두 새까맣게 칠해져 있었다. 집회나 시위는 완전히 금지되었고, 야간통행이 금지되었으며, 각급 학교는 휴교에 들어갔다. 6월 4일, 경희대생 200여 명이 교내에서 시위를 시도하였으나 출동한 군인들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말았다. 시위는 더 이상 일어나지 못했다.

이렇게 하여 굴욕적인 한일회담반대운동에서 시작하여 박정희 정권 타도투쟁으로 이어진 1964년의 한일회담반대운동은 3월 24일 시위 이후 72일 만에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6ㆍ3 시위 당시 구속된 학생들에게는 '내란죄'라는 터무니없는 무거운 죄가 적용되었다. 플래카드와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던 어린 학생들에게 내란죄를 적용하였다는 것은 박정희 정권이 6ㆍ3시위에서 느낀 위협과 충격이 얼마나 컸었던가를 반증반증어떤 사실과 모순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것을 증명한다고 볼 수 있는 사실하는 것이었다. 계엄이 선포된 6월 3일부터 8월 22일까지 총 352명의 학생들이 징계를 받았고 구속된 학생은 224명에 달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사법부의 독립성이 어느 정도 지켜지고 있던 때라, 박정희 정권의 법적용에 무리가 있다고 판단한 재판부와 검사들은 구속된 학생들을 줄줄이 풀어주었다. 석방의 행렬은 1964년 연말까지 이어져, 이명박, 김실, 박원규 등에게 집행유예가 선고된 12월 22일 이후, 박정희 정권이 계엄령까지 동원하여 진압했던 6ㆍ3시위는 단 한 명의 실형자실형자실제로 처벌받은 자도 남기지 않게 되었다.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조사

시체여! 너는 오래 전에 이미 죽었다. 죽어서 썩어가고 있었다. 넋 없는 시체여! 반민족적 비민주적 ‘민족적 민주주의’여. 네 주검의 악취는 ‘사쿠라’의 향기가 되어 ......
생전에도 죄가 많아 욕만 먹던 시체여! ......
절망과 기아로부터 해방자로 자처하는 소위 혁명정부가 절망과 기아 속으로 민족을 함멸시키기에 이르도록 한 너의본질은 과연 무엇이었느냐? ......
종잡을 길 없는 막연한 정치이념, 끝없는 혼란과 무질서와 굴욕적인 사대근성, 방향감각과 주체의식과 지도력의 상실, 이것이 곧 너의 전부다. 시체여!
- 1964년 5월 20일'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조사(弔辭)

대한 뉴스로 보는 한일회담 반대운동




질문이 뉴스를 만든 사람은 한일회담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